한나라당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박근혜 위원장이 이끄는 비상대책위원회가 당의 정책노선을 크게 좌클릭한 것이다. 정강정책의 핵심기조가 민주통합당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평생맞춤형 복지에 포함된 '보편적 복지'와 공정한 경제를 위한 '경제민주화'가 그것이다. 한나라당의 구성과 지지기반 등 정치적 조건을 고려해볼 때 경제민주화는 달성이 쉽지 않겠으나, '보편적 복지'는 상당부분 실천될 개연성이 크다. 결국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맞아 여야 간의 '보편적 복지' 경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사 최초의 사건으로 복지국가로의 발전 전망을 밝게 하는 좋은 징조이다.
2010년 6ㆍ2지방선거를 전후한 시기부터 무상급식을 주제로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논쟁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도한 2011년 8월 24일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계기로 꼭짓점에 도달했다. 이후 박원순 시장의 당선과 야권의 통합적 재편을 거치면서 보편적 복지는 정치사회적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 박근혜 위원장이 그동안 평생맞춤형 복지라는 이름 속에 조심스럽게 포함시켰던'보편적 복지'가 마침내 공공연하게 한나라당의 핵심적 정책노선으로 명시된 것이다. 선별적 복지를 고수하며 야당의 보편적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비난하던 한나라당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박 위원장의 말처럼 정말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선별ㆍ보편적 복지 논쟁은 대한민국 정치의 발전과 복지국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 논쟁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부 논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둘 다 하면 되는 걸, 왜 그렇게까지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보편적 복지는 시민권 보장을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생애주기에 걸쳐 필요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선별적 복지는 낙오하거나 근로능력이 없는 빈자들을 자산조사를 통해 엄격하게 선별, 추가적 지원을 하는 것이다. 둘 다 필요하다. 그래서 이 둘을 적절하게 조합해 실행하면 된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그런데 이는 옳은 말도 아니다.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민주당 정부 10년을 포함해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의 복지철학은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였다. 지난 20년 동안 '큰 시장, 작은 정부'라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시장만능적 경제정책과 짝을 이룬 선별적 복지가 그것이다.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보편적 복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보편성의 수준이 낮아 거론하기조차 민망한 지경이다. 고용보험은 대상자의 약 30%가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정작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도 대상자의 30%가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의 노후는 더 어렵게 생겼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것이 건강보험인데, 대상자가 모두 제도에 포괄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 또한 급여의 보장수준이 60%로 매우 낮아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국가 중 27위에 그치고 있다. 결국, 의료비 불안으로 인해 우리 국민의 70%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편적 복지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한 탓에 소득에서부터 보육·교육·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일자리,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복지를 각자 알아서 시장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이 시장만능 시스템에서 탈락한 소수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 국가가 선별적으로 생계를 보호했다. 나는 이러한 경제ㆍ복지 체제를 '신자유주의 경제-선별적 복지 체제'라고 규정한다. 이제 이것을 '공정·혁신적 경제- 보편·적극적 복지 체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역동적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자, 우리시대의 과제이다. 우리 정치가 해낼 수 있을까.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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