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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발작 이후,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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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발작 이후, 테오에게

입력
2012.02.0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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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레미 요양원에서박진성

오후에 발작,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다

간호사들은 대체로 친절하지만

캔버스를 자꾸만 치운다 팔레트와 물감도

훔쳐간다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 말고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튜브를 먹으면서 빨간색 물감만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에 묻은 물감은

피처럼 내장으로 번지고

내 영혼이 측백나무처럼 통째로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저 나무의 뿌리라든가

보이지 않는 물관을 팽팽하게 부풀려주는 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게 하라

죽음으로도 별에 닿을 수 없다면

내 영혼에 구멍을 내어주마

구멍 틈새로 별빛이 빛날 테고 너는 놀라서

이곳으로 달려오겠지만,

침대 밑에서 자고 싶은 자 침대 밑에서

자게 하라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벌레처럼

침대 밑을 기어 다니더라도 그것은, 테오야

낮은 곳을 그리기 위해 내 영혼을 대어보는 거란다

(중략)

캔버스 안에서 낯선 사내가 나를 보고 있다

측백나무 속이란다 테오야...

● 오랫동안 고흐를 병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0년에 걸쳐 900점이 훌쩍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1년에 90편씩, 그러니까 나흘에 하나씩 그렸다는 소리예요. 몸이든 정신이든 앓고 있는 사람이 하기는 어려운 작업량이지요. 병자가 아니라면 발작을 동반한 그 지독한 고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를 그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물론, 그 일이 힘들긴 하지만 아주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해." 그는 살아 있는 존재가 붓끝에 전하는 진동에 온몸을 떨었을 뿐 병자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고독했습니다. "내 영혼에 조그만 난로가 있는데, 아무도 불을 쬐러 오지 않는구나." 그 깊은 고독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까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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