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파키스탄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서방의 군대가 철수한 뒤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장악하려고 시도 중이라는 보고서가 공개됐다. 파키스탄 정부와 탈레반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 BBC 방송이 입수해 1일 보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 정보부(ISI)가 서방 정부와 탈레반 반군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중 플레이’를 펼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포로 4,000여명을 2만 7,000여차례 심문한 결과에서 수집된 첩보로 작성됐다.
‘탈레반의 상황’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보고서는 “파키스탄은 이미 탈레반 고위 간부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며 “탈레반 고위간부인 나시루딘 하카니 같은 경우에는 이슬라마바드(파키스탄의 수도)의 ISI 본부 바로 옆에 은신처를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NATO군에 사로잡힌 탈레반의 한 포로가 “파키스탄은 (탈레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고 고백한 내용도 보고서에 등장한다. 또 보고서는 “아프간인들은 부패한 현 정권보다 탈레반의 지배를 더 선호하고 있다”며 “탈레반이 아프간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고 분석했다.
탈레반이 고의적으로 NATO 군에 대한 공세를 자제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나왔다. NATO는 탈레반이 외국군 철수를 유도하기 위해 최근 공격 횟수를 줄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탈레반의 공격이 줄어 NATO군이 철수하면 아프간 군경이 치안이 담당하게 되는데, 그 때 다시 공세를 강화해 아프간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되찾겠다는 복안이다. NATO군은 지난해 7월 아프간 치안권을 현지 군경에 이양하려는 절차를 시작했고, 2014년 말까지 아프간 정부에 치안권을 모두 넘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아프간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NATO의 국제안보지원군(ISAF) 관계자는 “외부로 유출되지 말았어야 할 내부 비밀 문서”라며 보고서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그러나 NATO의 이 같은 분석에 파키스탄 정부는 “터무니 없는 얘기”라며 “우리 정부는 아프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하길 기대한다”며 탈레반과의 연루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한편 이 보고서가 공개됨에 따라 이날 아프간에서 열린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히나 라바니 카르 파키스탄 외무장관 사이의 평화 회담도 타격을 받게 됐다. 파키스탄이 아프간의 탈레반화(化)를 위해 의도적으로 평화 협상을 주도해 NATO군 철수를 유도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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