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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법관의 신상을 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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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법관의 신상을 털지 마라

입력
2012.02.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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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법관 수난 시대'다. 진보·보수 가리지 않는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풀려난 것에 항의하는 보수단체 회원들은 1심 재판장의 집 창문에 계란을 던졌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인기에 부담을 느낀 한 판사는 해당 재판의 합의 과정이 번복된 사정을 공개했고 그 결과 법원조직법 위반으로 징계가 청구된 상태다. 페이스북에서 방통위의 SNS 규제를 조소하며 '가카빅엿'이란 표현을 사용한 다른 판사도 재임용 심사 대상자로 분류된 상황이라 한다.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에서 사법부는 왜 시민들이 법원을 이토록 불신하게 되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영화에 환호하는 시민들 역시 그 불신과 분노가 '사법부 테러'를 정당화해선 안 된단 점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행동은 옹호자들의 항변대로 불충분한 증거에 비해 과한 형량을 받은 것일지라도 법적·도덕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석궁이 법관을 겨냥하는 것을 결코 용납해선 안 되는 이유는, 법관이 일반시민과 구별되는 고귀하고 지엄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석궁이 법관이 겨냥할 수 있는 세상에선 더 무서운 것들이 법관을 수월하게 협박하거나 포섭할 수 있고, 그 결과 법이 더욱 더 강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판결은 다른 법조인과 시민사회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법리해석에 대한 이견이 제기될 수 있고, 법논리를 벗어난 더 근본적인 시선에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판결문이 공개되어야 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법관이 중용될 수 있는 제도가 고민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판결문의 논변을 적시해 비판하는 것과 '신상 털이'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법원이 정권의 전횡에 브레이크를 거는 판결을 냈을 때, 보수언론들은 '우리법연구회'라는 '좌파'단체가 영향을 끼쳐 황당한 판결을 내린 것인 양 비난했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개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보수언론은 법관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한 대법관의 그릇된 행동을 문제삼지 않고 이를 비판한 판사들을 두고 "좌파들이 사법부를 흔든다"고 비난했다. 이것이 잘못된 일임이 명백하다면, 판결이 한번 나올 때마다 해당 판사의 출신지역·출신학교 등을 까발리고 그가 어떤 인맥 때문에 이런 판결을 내렸을 거라 비난하는 누리꾼들의 행태도 잘못된 것이다.

법관에 대한 인격적 비난이 그릇된 이유는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신념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법리는 멋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똑 떨어진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허용오차' 내에서 어떤 '답'을 내릴지에 대해선 법관의 재량이 개입한다. 이 재량에는 개인적 성향뿐 아니라 꾸준히 변화하는 사회의 통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판결이 수학 문제의 답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압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판결이 컴퓨터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란 점을 말하는 것이, 판결엔 어차피 객관성이 없으므로 모든 압박이 정당화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세상일엔 수학교수의 머릿속 엄밀함엔 못 미칠지라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3심제도는 그 규칙의 요동을 다소나마 보완하기 위해 존재한다. 만일 법관의 성향과 신념이 다양하지 않다면 판결은 외려 잿빛이 될 것이다. 오히려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의 계층 및 성향이 비슷비슷한 것이 현재 한국 법조계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원인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합당한 사법개혁의 요구를 위해서라도 법관에 대한 인격적 비난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언론과 시민이 함께 '신상 털기'를 하고 있다면 먼저 비판받아야 할 것은 언론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이 개념을 상실한 사회에선, 명랑사회를 위해 시민들이 먼저 개념을 탑재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법관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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