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쇠고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문자를 보냈다. 아들딸이 다 모여 있다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니 허전하고 더 보고 싶단다. "보고 싶다"가 아니라 "보고 십다"였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자식들이 집에 가 있어 봤자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하는 것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으신지 물어봤다. 어머니는 "그저 좋지"라며 또 목이 메신다. 그 억척스럽던 어머니가 이렇게 약해졌구나 싶었다.
사실 같은 질문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에게도 물었다. 명절이라고 집에 내려오면 늘 똑같았다. 먹고 자고 뒹굴고 먹고 자고 뒹굴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서로 그 동안 살던 속내를 밤새 털어놓는 것은 고사하고 텔레비전을 같이 보고 품평하는 것도 별로 없었다. 각자 보는 프로그램이 달랐고, 다행히 방방마다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래도 두 분은 "그저 좋다"고 한다. 자손들이 방방마다 그득하니 기분이 마음이 푸근하다고 하신다. 그저 같이 있는 것이 '효도'다. 그래서 예정보다 하루 더 있다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다. 다른 사람처럼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정규직'도 아니고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두 '노인네' 이만한 바람도 못 들어줄까 싶었다.
사실 고향집에 자주 내려가고 내려가면 오래 있다 오는 나를 친구들은 좀 신기하게 여긴다.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친구부터 부모님과 유달리 사이가 좋은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는 친구까지 다양하다. 다들 마음은 부모님에게 잘해드리고 싶지만 막상 집에 내려가서 하루만 지나면 다시 서울 올라오고 싶다고 말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 문제로, 결혼하고 나면 자식 낳는 걸로, 자식을 놓고 나면 자녀교육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친척들과 부모님의 잔소리가 어머 어마한 스트레스인데 괜찮냐고 물어본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왜 결혼하지 않는지 '걱정'하는 친척들도 없고 부모님도 자식들 일에 크게 '닦달'하지 않으시는 분들이다.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게 된 것의 8할은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 덕분이다. 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다. 단칸셋방을 살던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서 어머니가 시장에서 다른 아주머니들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것도 종종 봤다. 만화방을 한 적도 있었는데 다른 만화방에서 자기네 책을 훔쳐왔다고 쳐들어와서는 거의 만화방을 때려 부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억척스러웠던 반면 아버지는 집에 거의 계시지 않았다. 덤프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때는 중동으로 일하러 가셨고 돌아와서도 계속 건설현장에 계셨다. 가끔 집에 들어오실 때는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 당신 인생 넋두리를 하셨는데 그렇게 초라하고 무능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이다. 그의 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억척스럽고 지독한 어머니와 무능하거나 부재한 아버지는 딱 우리 집 이야기였다. 대리만족이 아니다. 그를 통해 비로소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삶을 '두 분'의 삶이 아니라 그 시대를 건너온 대다수 사람들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잘못 한 게 아니구나. 두 분의 삶 뒤편에서 역사가 보이면서 나는 그들의 억척스러움과 부재와 화해할 수 있었다. 대신 시대와 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이건 영화건 '서사'가 가진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낱개의 삶에서 역사를 볼 수 있게 기운을 북돋우는 것, 그래서 살을 부비고 사는 주변의 사람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이 화해를 통해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시대를 견딜 수 있게 된다. 거짓 적대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람 뒤에 가려져 있던 세상과 적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자기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시대만큼 불행한 시대가 없다. 누구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에 남은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한없이 가벼운 냉소뿐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돌아가신지 1년이 되었다. 그 분의 뒤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가.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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