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 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중략)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 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 나온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던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치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 우리가 더 나아지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 꽃은 필 테지만 반드시 꽃가루 알레르기를 동반할 거라는 것, 그런 믿음이 대체 무슨 소용이지? 이렇게 당신은 물을 수도 있겠지요. 시인은 세상에 대한 장밋빛 낙관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드리안 리치는 "희망은 깨끗한 유리병 속 물처럼 반짝거린다"고 했어요. 희망은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가려주지는 않습니다. 유리병 속 투명한 물은 그 유리병을 투과하여 더러운 풍경들을 그대로 보여줘요. 살인이 멈추지 않고 전쟁이 치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만큼 우린 믿습니다. 세상의 오물들과 섞이지 않고 병 속에 담겨있는 물처럼 반짝이는 희망이 있다는 것. 쓰레기통에서도 그 물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 봄이 오고 반드시 꽃은 핀다는 것. 아드리안 리치만큼 씩씩한 시인 김이듬의 말을 나는 믿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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