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휴전협정 다음해인 1954년부터 실시한 3개년 개혁으로 전후 복구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북한은 이를 바탕으로'인민경제 5개년 개혁'(1957~1961)을 실시하려 했으나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 경제건설 노선을 둘러싸고 종파투쟁이 발생했고, 소련 등 사회주의 우방의 원조 삭감으로 자본과 기술, 물자 부족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과 동구를 순방하면서 원조를 요청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체 자원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한 집단적 증산운동이 불가피했다. 바로 천리마 운동의 등장 배경이다. 1959년 3월 평남 강선제강소의 천리마 작업반 운동을 모범 삼아 공장, 기업체, 농장, 학교 등 전 분야의 노력경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이 운동에 따라 천리마 시대, 천리마 속도, 천리마 기수 등 숱한 용어와 칭호가 등장했다. 사상 고양과 경쟁을 통한 노동력강화 운동인 천리마운동에 힘입어 북한은 5개년 계획 목표를 1년 앞당겨 달성했다.
■ 북한은 천리마 운동 이후에도 끊임 없이 자력갱생을 위한 속도전 운동을 전개했다. 비날론 속도는 1961년 흥남 비날론 공장 건설 당시 3,500%의 계획 초과 달성에 붙여졌다. 1970년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이 강철생산량 2배 달성을 결의하면서 강선속도라는 명칭이 붙었다. 지난해 말 댐 공사가 끝난 평북 희천 수력발전소 건설은 희천 속도라는 기치 하에 진행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10년 걸릴 공사를 2년 반 만에 끝냈다고 선전했다.
■ 노동신문 1월 30일자는 김정일 생전의 속도전 업적을 기려 "우리 인민을 만리마에 태워 기적적 승리와 변혁을 이룩했다"고 찬양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만리마라는 표현은 김일성이 처음 사용했다. 자신은 인민을 천리마에 태워 천리마 시대를 열었다면 김정일은 만리마에 태워 속도전 시대를 열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북 매체들이 연초부터'함남의 불길'과 만리마 등 속도전 용어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다. 김정은 체제가 외부지원 없는 자력갱생에 더욱 의존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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