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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허수아비 정치는 이제 그만!

입력
2012.01.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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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 바람이 분다. 벼들이 넘실거린다. 참새들이 군침을 삼키며 달려든다. 바람결에 허수아비가 눈을 부릅뜨고 춤을 춘다. 어이구, 참새들이 놀라서 도망간다. 그러나 탱탱하게 영근 알곡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가만히 보니 허수아비는 그 자리에만 서 있다. 아하, 저건 사기다. 참새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내려온다.

한나라당이 새 정강ㆍ정책을 내놓는 걸 보면서 떠오른 단상이다. 성장, 큰 시장, 기업 우선이 떠나고 경제민주화, 공정한 시장, 복지가 자리했다. 불과 4, 5년 전 "좌파정권 10년 동안 나라가 망했다"고 했는데, 이제 그토록 공격했던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있다니!

한나라당의 변신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세상이 바뀌면, 가치도 바뀌고, 정당의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 법. 다만 세상을 이념으로 가르고 낙인 찍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지를 한탄하고 싶을 뿐이다.

이제 거짓의 '허수아비 정치'는 끝내야 한다. 그것은 보수나 진보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진보와 보수를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는지, 어느 게 더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아직도 이념적 편가르기를 하는 고매한 논객들에게 묻고 싶다.

우선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진정 진보였는지부터 따져보자. 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학자들과 이념의 과잉을 토론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논한 대목을 옮겨보자. "김대중 대통령은 뭐냐 이거지? 그분의 말, 글, 정치이력을 전체로 들여다보면 진보주의자인 건 맞거든. 그런데 그때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정책들이 수두룩했다."(노무현 유고집 중에서)

김대중 정부가 생산적 복지, 사회안전망 확충 등 복지의 기틀을 만든 것은 진보적 가치의 실현이었지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추진했던 구조조정, 민영화, 노동유연성 확대 등은 보수적 가치라는 것이다. 그는 참여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 이라크 파병, 정리해고 수용 등도 보수 정책이라고 자인했다. 이게 진짜 진보라는 세력들이 두 정부를 '좌측 깜박이를 켠 우회전'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폄하하는 이유다.

에는 이런 독백도 나온다. "이거 하나는 내가 좀 잘못했다. 예산 가져오면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하고 색연필로 쫙 그었어야 했는데, 어느 부처 몇 프로 깎고, 어디 몇 프로 올리고, 10년 뒤 어쩌고 하다 보니 '그것만 해도 많이 올랐네' 이리 간 거다. 그냥 올해까지 30프로, 이런 식으로 쫙 그어버렸어야 하는데… 논리적으로는 그리 했으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노 전 대통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보, 보수 중 어느 쪽이 옳다는 게 아니라 국가를 이끄는 데 이념보다 우선된 불가피한 상황이 있고, 진보와 보수는 서로 일정 부분 겹치는 경향성의 차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다. 보수정권이라고 해서 경쟁을 위해 비정규직 양산, 정리해고 확대를 권장하고 복지예산을 줄여 퇴직 근로자들의 불안한 미래를 방치할 수 있을까. 재벌의 딸들이 골목 빵집까지 뺏는 현실에서 '감세가 살 길이요 규제는 나쁘다'는 보수적 가치만을 외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진보정권이라고 해서 모두 정규직화하고, 해고를 어렵게 하고, 임금을 올리고, 복지수당을 늘리고, 이를 위해 법인세 소득세 재벌세 등 세금을 잔뜩 올릴 수 있을까. 한미 FTA를 폐기하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가.

누구도 이게 가능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지향점이 다를지언정, 100% 한 쪽의 가치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건 박근혜가 집권해도 그렇고 안철수나 문재인 손학규 정동영이 맡아도 그렇다. 지금은 복지와 재정, 그리고 재생산 구조를 연계시키는 정교함, 적정한 수준의 양보가 전제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소통 능력이 필요한 때지, 이념으로 낙인 찍고 증오를 부추길 때는 아니다. 아직도 '좌파 정권 10년'을 운운하는 논객들이 있다. 신물이 난다. 이제 허수아비 정치는 그만두자.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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