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자보(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대오를 이뤄 걷는 건 불법이다. 몸자보를 벗어라."(경찰)
"인도를 걷는데 왜 행진을 막는 거냐. 차라리 잡아가라."(희망 뚜벅이 참가단)
30일 낮 12시 20분 서울 종로구 이화사거리.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발걸음'이라고 적힌 자줏빛 조끼를 입고 거리에 나선 80여명이 경찰 병력에 막혀 멈춰 섰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희망 뚜벅이' 발대식을 가진 뒤 둘 셋씩 짝을 지어 인도로 이동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미신고 불법 시위 행진"이라며 전경버스 3대와 200여명의 경력으로 행렬을 막고 이들을 둘러쌌다.
'희망 뚜벅이'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로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대표 사업장 16곳을 13일 동안 걸어 다니며 희망을 전파하겠다며 만들어진 모임이다. 이들은 재능교육, 세종호텔, KEC, 기아자동차, 콜트콜택, 유성기업, 대우자동차판매, 쌍용자동차 농성장 등 서울ㆍ경기 지역의 노동자 장기 투쟁 현장을 찾아 걷겠다며 길을 나섰다. 이날은 배우 맹봉학씨만 왔지만 앞으로 배우 김여진, 영화감독 변영주, 시인 김선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도 응원단장 자격으로 함께 한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합의가 되긴 했지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는 몇 군데 '나쁜 기업'만의 일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는 제도를 만들고 새로운 희망을 함께 만들기 위해 나섰습니다." 희망 뚜벅이 기획단의 김혜진씨는 이번 행동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재능교육에서 11년을 일했다 해고된 여민희(38)씨는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며 "희망 뚜벅이의 행진으로 우리처럼 고통 받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대식을 마친 희망 뚜벅이들은 광화문 KT와 아현동 철거지역, 서울역을 거쳐 중구 세종호텔에서 촛불문화제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찰에 막혀 출발지인 재능교육 본사에서 1km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구호가 적힌 조끼를 벗을 수 없다고 경찰과 대치하던 참가자들은 오후에는 즉석에서 마이크를 설치해 막간 문화제를 열기도 했다.
KT에서 해고된 조태욱씨는 "KT 앞에서 희망 뚜벅이를 기다리다 오지 않아 내가 걸어왔다"며 "노동자의 희생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백기완 통일연구소장은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권력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며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이 열릴 때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을 테니 과녁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경찰은 오후 내내 벽을 풀지 않았고, 참가단은 결국 흩어져 오후 7시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촛불문화제만 예정대로 진행했다. 31일에도 희망 뚜벅이 행진은 세종호텔에서부터 강남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까지 이어진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허경주기자 fairyh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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