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프레베르
어둠 속에 하나씩 불 붙이는 세 개피 성냥
첫 개피는 너의 얼굴 모두 보려고
둘째 개피는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개피는 너의 입을 보려고
그리고 송두리째 어둠은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려고.
● 철학자 리오타르는 '반(反)영화'라는 글에서 성냥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성냥을 소비하기와 성냥을 낭비하기. 한 사람이 출근하기 전에 커피 물을 데우려고 성냥으로 불을 켭니다. 그건 합리적인 소비지요. 그러나 한 아이가 불꽃을 보려고 쓸데없이 성냥을 켭니다. "차례차례 바뀌어가는 색채를,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겁니다. 리오타르는 이것은 낭비이며 헛된 희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예술적 활동과 같다고 말합니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등화관제가 빈번했던 1940년대 파리. 캄캄해진 도시 한 구석에서 한 사람이 연인의 얼굴을 보려고 성냥불을 켭니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잠깐 잊습니다. 그럼, 이런 사용은 소비와 낭비 중 무엇에 해당되는지? 커피 물이 끓지는 않지만 작은 불꽃에 환해진 얼굴과 눈과 입술로 내 영혼은 데워졌는데.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