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와 5의 배수는 20, 따라서 4년마다 치러지는 총선과 5년마다 치러지는 대선이 겹치는 해는 2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온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다. 그런 만큼 올 한 해 내내 정치 이야기가 풍성할 전망이다. 이런 판에 정치에 관한 담론을 한 가지 더 얹는다면 민폐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문학적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본다면 조금 색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은 연전에, 그렇잖아도 까다로웠던 정치관이 더욱 까다로워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여성 아나운서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소속 정당에서 축출된 한 국회의원의 사건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물의를 일으킨 그 사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자기 블로그에 쓴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지금 당 대표가 되어 있는 여성 정치인을 "섹시하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된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므로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그의 발언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란 참 묘한 것이라면서, 정치는 예쁜 여자를 봐도 무덤덤할 수 있는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드니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고 말했다.
여론의 비난은 그 의원의 여성관에 집중될 뿐 그의 정치관은 문제삼지 않는다. 실제로 "정치가 남자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정치인이나 일반 국민들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심지어 호방한 태도라고 좋게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도 될 일일까?
마초적인 태도는 불쾌하긴 해도 별 문제는 아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도덕도 큰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가 정치를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무대로 여긴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치는 그의 가슴을 뛰게 하거나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의사는 한두 명의 생명을 살리지만 정치인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레닌이 한 말인데, 의사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정치의 책임성을 강조하려는 취지다. 금리 0.1%를 올리거나 내리는 '정책'으로 수백만 명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건 엄연한 현실이니까. 그래서 그는 정치를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정치는 섬세함과 정교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정치의 특징은 권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자신이 평생 다 만나지도 못할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남에게 영향을 주는 일에는 당연히 막중한 책임성이 따른다.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치란 기본적으로 즐거운 일이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이어야 할 게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게 가슴이 뛸 만큼 '하고 싶은 일'이라면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어차피 정치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인데, 너무 까다롭게 보는 거 아니냐는 반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섬세한 권력 행사를 요체로 하므로 까다로움은 곧 엄밀함과 통한다. 엄밀하게 보면, 정치인의 참된 자질은 정치적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권력의 행사를 부담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정치가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좋은 정치인을 발탁할까? 그래서 정치인은 자신이 나서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추대를 받는 게 좋다. 실제로 역사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인물이 있었다. 유비가 삼고초려로 모신 제갈량 같은 정치인이다. 그는 정치적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정치를 부담스럽고 괴로운 일로 여겨 한사코 발을 들이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강권에 못 이겨 떠맡았다.
말하다 보니 현재의 정치인들과 정치 풍토를 싸잡아 비난하는 꼴이 됐지만, 올해에는 특히 유권자들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학창 시절의 경험으로 보면, 나서서 반장을 하려는 급우보다 마지못해 반장을 맡았던 급우가 늘 반장 노릇을 더 잘했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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