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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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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은 무엇인가

입력
2012.01.2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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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연휴에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 네 권을 읽었다. 여러 소문을 들었으나 큰 기대 없이 가벼운 독서로 출발했다. 그런데 첫 권을 마치면서 우선 읽는 자세를 바꿨다. 편안하게 기대어 읽을 수가 없어 정색하고 앉아야 했다.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이 작가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두고 정론적 평가 자체를 외면했던 필자로서는, 만만찮은 충격과 함께 작가 및 작품을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궁화...>는 이야기의 재미와 규모가 남다른 반면 서사 구조와 미학적 가치의 결손이 너무 컸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라는 명제의 표본으로 간주될 만했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지나 만난 <고구려>는, 과장하여 말하자면 상전벽해의 느낌을 주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챙겨 읽지 못해 이 두 작품만의 비교에 따른 결과이기는 하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 또한 현대사회로부터 고대의 역사공간으로 옮겨간 차별성이 있기는 하다.

<고구려>는 역사소설이 가진 미덕을 발양하여, 협소한 사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쳤다. 고구려 15대 미천왕 을불과 당대의 재상이었던 창조리를 중심으로 전략과 경륜, 인품과 지혜의 다양다기한 측면을 천착했다. 무엇보다 소설 읽기의 재미와 여운이 길게 남는 교훈을 놓치지 않았다. 때로 무협소설을 방불케 하는 우연성 또는 극적 구성의 남발, 역사 전체의 성격에 대응하기 어려운 제한적 시각 등이 여전히 잔존한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보다 먼저 고구려를 알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문학작품의 성과를 인정하는 문화환경도 <무궁화...>때에 비하여 많이 달라졌다. 문자문화 활자매체의 시대는 어느덧 그 주류가 영상문화 전자매체의 시대로 전환되었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순수문학과 오락성을 앞세우는 대중문학의 경계, 심지어 작가와 독자의 경계마저도 모호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더 나아가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상업주의문학의 구분이 과거와 같은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고 보면, 김진명식 비본격소설의 영역을 지난날의 잣대로 측정하는 방식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는 시기에 이르러 우리 작가들은, 여전히 작품의 정교한 짜임새에 몰두하거나 형식실험에 침윤하는 관행을 과감히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통해 독자와 교통하는 소설의 본원적 기능을 되살리면서, <고구려>가 보여준 인물 설정과 묘사의 활달한 본색을 회복했으면 한다. 그 가운데서 시대와 인간, 논리와 감동이 어우러지는 호방한 서사문학이 창달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누보로망 작가 로브그리예가 말한 바,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문학사가 포용한 초상화 전시장에 새로운 초상을 부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을불과 창조리, 주아영, 최비, 단목중걸, 모용외 같이 생동하는 힘과 복합적 의미를 가진 인물들의 형상화가 결코 간략한 기량 위에서 산출되었을 리 없다. 작가는 이 작품을 17년 간 준비했다는데, 미상불 작품의 성장은 곧 작가의 세계관 성숙과 비례할 것이다. 일찍이 드라마작가 신봉승의 붓끝에서 만고역적 한명회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경세지략가로 변환된 것은, 충실한 사료의 검색과 객관적인 재해석의 노력이 있고서야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근래의 방송사 텔레비전 사극들은, 지나치게 고증의 엄정성을 무시한다.

역사적 사실성을 훼손한 채 문학적 상상력만 확대해서는 결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역사문학은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 중심 줄기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생성되는 혼종성의 예술이다. 사실성에 치우치면 문학적 묘미가 사라지고 상상력에 치우치면 역사적 근거가 취약해진다. 이 양자를 거멀못처럼 잘 결부하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산출한 이병주나 이문열의 역사 소재 소설들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문학이 독자에게 깨우침과 즐거움을 함께 공여해야 하는 시대에, <고구려>는 하나의 새로운 범례를 선사했다. 그런 만큼 다수 독자의 눈길로부터 주목 받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문학이, 선 자리와 갈 길을 다시 돌아보는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김종회 경희대 교수·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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