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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머니 깍두기와 장모 식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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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머니 깍두기와 장모 식혜

입력
2012.01.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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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고향에 다녀오면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고향 가는 길은 막혀도 부모, 형제들, 조카 등 친척들과 함께 수다를 떠는 재미와 오랜만에 옛 친구들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더욱이 좋아하는 만두국이나 설음식을 마음껏 먹다 보면, 갑자기 살은 찌지만 그래도 즐겁다. 올해도 나는 가족과 함께 고향에 다녀왔다.

설 차례를 지내고 귀경길에 오르면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이것저것 싸준다. 때로는 당신이 쓰지 않은 낡은 물건들도 주시고, 먹을 것도 담아준다. 명절 때 고향에 갈 때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엇을 가득 담아주신다. 올해도 어머니는 깍두기 두 통을 담가서 건네 주셨다. 어머니는 여든 초반을 넘어 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깍두기나 김치 등을 담그지 말하고 해도, 말은 듣지 않으신다. 내 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깍두기 하나는 일품이다. 어머니의 손맛은 많이 변했지만, 깍두기는 여전히 옛 맛 그대로다. 듬성듬성 썬 무로 담근 깍두기에 국 하나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처갓집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전북 전주여서 고향에 가면 들렀다가 서울로 온다. 장모께서도 여든이 되셨고 시력도 좋지 않으시다. 순창분인 장모는 요리 솜씨가 남다르다. 장모의 곰국은 서울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어느 음식점 곰국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아들 녀석들은 맛이 별로라고 한다. 처갓집에 가서 나오는 음식들은 모두 맛있는데 아들 녀석들은 맛있게 먹지 않는다. 하기야 아이들의 입맛이란 달면 맛있고 그렇지 않으면 맛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장모가 만든 식혜만은 아이들도 매우 좋아한다. 장모 식혜는 밥알이 그대로 살아있고 약간 생강냄새를 풍기는데 달지도 않으면서 맛은 깨끗하다.

어머니가 깍두기 두 통과 장모가 건네 준 패트 병 3개에 가득 담겨있는 식혜를 차 트렁크에 넣고 길은 막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향했다.

나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하면 다른 것 필요 없이 고기무국을 끓여 먹자고 제안했다. 무국에다가 어머니가 주신 큼직한 깍두기와 함께 먹으면 그보다 맛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장모가 주신 식혜 한 잔 마시면 최고의 식탁되리라 생각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아내는 고기무국을 준비했고 깍두기 하나만 가지고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한 수저 가득 무국을 뜬 후 큼직한 깍두기 하나를 먹었는데, 깍두기 맛이 영 이상해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깍두기 모양이나 색깔을 보면 분명히 어머니 깍두기인데 맛은 아니었다. 깍두기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깍두기만 먹어보니까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간 듯했다. 물에 씻어 먹어도 먹을 수 없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깍두기 먹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무국만 먹고 난 후 식혜를 한 잔 마셨는데, 식혜 맛 역시 이상했다. 식혜에 향긋한 생강냄새가 나야 하는데 마늘냄새가 너무 심해서 마시기가 힘들었다.

저녁을 먹고 쉬는데 어머니에게서 잘 도착했냐는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눈이 잘 안보여서 깍두기를 담글 때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은 것 같다고 물에 씻어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먹을 만해서 맛있게 먹었다고 대답했다. 장모에게도 연락이 왔는데, 마늘 즙을 넣은 패트 병에 식혜를 담았는데 괜찮으냐는 것이었다. 장모는 마늘냄새가 날 것 같아서 수십 번 패트 병을 닦았지만 그래도 마늘냄새가 좀 나지 하셨다.

어머니나 장모가 모두 여든이 넘어서 시력도 나쁘고 입맛도 잃어버려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도 음식색깔은 검고 칙칙하며 음식간이 맞지 않아 때로는 짜고 때로는 싱겁다. 나도 아내도 나이가 더 들면 그렇게 되리라. 나는 벌써 자식의 무게가 느껴지는데, 부모는 얼마나 자식의 무게가 무거울까. 굽어진 허리로 깍두기를 열심히 담는 어머니와 식혜를 만드시는 장모의 영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전화를 끊고 다시 깍두기와 식혜를 천천히 맛보았다.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주창윤 서울여대 방송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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