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과 사회의 경쟁력/이재열 등 지음/서울대출판문화원 발행ㆍ248쪽ㆍ2만원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는 말은 신뢰가 무너진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실을 웅변한다. 대통령의 권위는 이미 시장 길바닥에서 짓밟힌 지 오래다. 정치인은 거짓말쟁이 대접 받기 일쑤고, 기업인이나 부자는 도매금으로 사기꾼 취급 당한다. 편 가르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 기업과 사회의 경쟁력> 은 이 같은 '불신 신드롬'이 국가경쟁력에 중대한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불신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가 북미나 서유럽 수준의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은 요원하다고 본다. 불신의 문화가 판 치고, 제도의 투명성 등이 저급한 상태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해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봐야 공회전하는 엔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한국>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이 '21세기 한국의 미래 발전과 성장 동력'이라는 주제로 진행 중인 학제간 연구의 성과 중 일부를 담은 이 책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그 문제를 해결해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핀 5편의 글을 모았다.
김병연 경제학부 교수가 서문에서 지적한 대로 그를 비롯해 연구ㆍ집필에 참여한 이재열(사회학과) 김광억(인류학과) 전재성(정치외교학부) 홍기현(경제학부) 교수는 '기업의 경쟁력이 기업 자체의 기술력이나 인사, 재무관리 능력 등 내부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지만 외부 요인, 특히 국가 단위의 요인에 크게 영향 받는다'는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책이 화두로 삼는 것은 '한국은 과연 수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지극히 경제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수출 전략이라든가, 전략 산업으로 이런저런 것을 육성하라든가 하는 식이 아니다. 인문학적인 성찰과 사회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담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은 자본 면에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으나 정책이 부족하고 제도는 함정에 빠져 있다는 김병연 교수의 분석과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불신과 낮은 투명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재열 교수의 지적이다.
각국의 경쟁력 결정요인을 비교한 김병연 교수는 한국이 자본(고정자산, 취학률, 연구자 숫자 등)은 비슷한 소득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이지만 정책은 연구투자 지출 비중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시장 규제, 창업, 공공지출 교육비 모두 매우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부패, 법질서, 관료의 질, 사법부 독립성 등 제도 요인들은 거의 대부분 심하게 낙후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그 이유를 '타인, 그리고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등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아' 바람직한 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는 데서 찾았다. 또 높은 수준의 물질적 가치관을 지닌 것도 이유로 들었다. 발전 동력을 이 같은 제도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지만 '제도의 뿌리가 되는 문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변하는 특성'이 있어 한국이 여기서 '속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사회 갈등을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이재열 교수는 한국의 경우 인종ㆍ언어적 갈등이나 불평등 등 갈등 요소 자체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갈등을 해소할 장치가 지극히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지니계수)과 불신을 분자로 하고 복지지출과 거버넌스(행정 등 공공경영)의 합을 분모로 한 갈등 지수는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상위이다.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로 민주주의와 거버넌스, 복지지출을 꼽는다면 한국은 복지지출 면에서는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고 거버넌스의 역량도 미약하다.
그는 한국이 최근 20년 사이 '높은 일반신뢰와 낮은 투명성'으로 대표되는 권위적 위계사회에서 '낮은 일반신뢰와 낮은 투명성'의 전이 지대로 진입했지만 서구 선진국 같은 '높은 일반신뢰와 높은 투명성'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그는 '합리적ㆍ법적 권위가 작동하는 민주적 개방사회로의 전환이 지체된다면 이는 경제성장이나 정부의 정책 집행, 갈등 해소 등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될 것'이라고 봤다. '청렴성, 공정성, 투명성 등을 제고할 정책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선진국 진입은 요원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의 외교 역량을 살핀 전재성 교수는 '중견국 외교'로의 탈바꿈을, 김광억 교수는 유교적 이성주의와 도교적 유연성 등 아시아적 문화가 갖는 장점을 되돌아 볼 것을 주문했다. 홍기현 교수는 경제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인의 사회 인식을 문제 삼고 이 같은 인식의 지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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