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巖山下路)/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1881년 6월 충남 서산 연암산 천장암(현재 천장사)의 한 평도 안 되는 구석방에서 1년여 치열하게 정진하던 경허(鏡虛ㆍ1846~1912) 스님이 문을 박차고 나서면서 부른 오도송(悟道頌)이다. 누더기 한 벌만 걸친 채 이가 들끓고 모기와 빈대가 물어대는 가운데 공양도 대소변도 모두 방에서 해결하면서 깨친 득도의 노래다.
경허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새벽별’로 불린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전국 각지에 선방(禪房)을 열고 수행납자에게 문답도 해주는 등 끊어졌던 간화선(看話禪) 진작에 힘썼던”(조계종 불학연구소장 허정 스님ㆍ천장사 주지) 까닭이다. 그의 열반 100주년을 맞아 문하인 덕숭산문(德崇山門)을 중심으로 각종 기념사업이 펼쳐진다.
최근 설립된 ‘경허 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추진위원장 지운 스님(수덕사 주지)은 “경허 스님은 조계종의 실질적 중흥조이지만,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할 기행(奇行) 탓에 그 동안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허 스님의 대표적인 기행으로는 ‘알몸 법문’이 꼽힌다. 스님은 어머니를 포함한 불자들 앞에서 법문을 하다 갑자기 옷을 모두 벗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어머니는 이 모습을 보고 내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제 본 모습이 아닙니다.” 불자들은 경악했다. 어머니마저 “경허 스님이 미쳤다”고 소리치며 법당을 빠져나갔다.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천진무구한 아기의 모습을 어머니 앞에 재연했지만 아무도 스님의 참뜻을 알지 못했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祖室)로 있을 때 일이다. 나병에 걸린 미친 여인이 경내로 들어왔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여인을 불러들여 침식을 같이했다. 제자들은 비구가 목숨처럼 지켜야 할 불음행계(不淫行戒)를 스승이 어긴 것이라 생각해 원망했다. 정신이 되돌아온 여인이 경허 스님에게 큰 절을 올리고 떠났을 때에야 스승의 높은 뜻을 제자들이 헤아리게 됐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과천 청계사에서 동진(童眞) 출가해 59세 때인 1905년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삼수갑산에 몸을 숨긴 경허 스님의 기행은 최인호씨의 소설 에서도 자세히 소개됐다.
기념사업회는 경허 스님의 기행에 대한 세간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을 발간하기로 했다. 또한, 진위 논란을 빚고 있는 수덕사본, 월정사본, 통도사본 등 여러 경허집을 비교ㆍ통합해 을 재발간할 예정이다.
경허 스님은 선승(禪僧)으로서만 아니라 선필(禪筆)로도 유명하다. 이를 조명하는 선서화전과 유물전시회가 3월 26일부터 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 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6월 13일에는 조계사 대웅전에서 ‘경허 문하의 빼어난 세 달(月)’로 일컬어지는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스님 등의 법손들과 불자들이 모여 대규모 다례제(茶禮祭)도 연다.
6월 경허 스님의 선수행을 체험하는 국제 선수행프로그램이 서울 화계사에서 마련되며, 10월에는 조계종 교육원 주관으로 스님의 삶과 사상,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도 개최된다. 이밖에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스님이 깨달음을 얻었던 천장사와 해인사, 범어사, 월정사, 수덕사 등을 여행하는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스님의 삶과 발자취를 담은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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