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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발적 예술행위가 덜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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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발적 예술행위가 덜 잔혹하다

입력
2012.01.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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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객이 1993년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 현장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 앞에 섰다. 젊은 작가들의 도전적인 미술 실험을 긍정해 그 해 처음 도입된 '아페르토' 전시 섹션에서다. 거기서 관객은 어미 소와 어린 송아지 사체가 방부용액으로 꽉 찬 유리탱크 4개에 잠겨 있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분명 어느 시기까지는 살아서 먹이를 먹고 걸어 다녔을 그 두 마리 동물은 이제 몸이 가로로 길게 양분돼 내장 기관을 속속들이 노출한 채 예술작품이 됐다. 관람자는 이 작품의 노골성과 폭력성에 움찔한다. 하지만 이내 제대로 된 작품 감상을 위해서, 두 편으로 절단된 어미 소의 몸뚱이 사이를, 곧 이어 송아지의 그것 사이를 관통하며 구경할 것이다.

영국 현대미술가 데미언 허스트의 '분리된 어머니와 아이'라는 설치작품을 둘러싼 이야기다. 당시 이 문제적인 작품은 동물보호단체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또한 논란이 알려지자 시민사회의 윤리적 지탄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허스트에게 '분리된 어머니와 아이'는 명성과 부의 탄탄대로를 연 신호탄이었다. 덕분에 80년대 말 영국 신세대 미술(yBa)의 총아로 떠오른 이래 지금까지도 경이적인 작품가, 도발적인 예술 성향 등으로 '해가 지지 않는 현대미술 제국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이후 그 자본주의 예술가의 노회한 전략 속에서 소와 송아지는 물론 망자의 실제 두개골, 임신한 여인의 신체 모형까지 서슴없이 이용됐다. 동시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미술의 이름으로 까발려졌다. 그걸 두고 혹자는 도덕도 인륜도 상관없이, 세간의 주목을 끌어 제 이름값을 높이고 경제적 이익을 거둘 수만 있다면 미술은 '모든 것을 다 해도 좋은 것이냐'고 비판한다.

이 같은 현대미술계의 기괴한 단면이 새삼 머리를 어지럽힌 것은 최근 한우 값 폭락 및 그에 대한 정부 대책을 보면서다. 한우를 키우는 농가들은 폭등하는 사료비와 그에 반비례로 폭락하는 소 값 때문에 급기야 자식 같은 가축을 굶겨 죽이는 사태까지 겪고 있다. 전국한우협회는 청와대를 향해 소떼를 앞세워 '한우 반납 시위'를 도모했을 지경이다. 이에 정부는 등급 낮은 암소를 도태시키고, 군납용 고기를 한우로 대체하겠다는 식의 해결책을 내놨다. 또 농림수산식품부와 농협은 1만원에도 거래가 안 되는 육우 송아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요리를 개발하고, '성 감별 정액'을 써 인위적으로 암컷 젓소만 골라 낳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요컨대 시장의 공급과 수요에 균형을 맞춰 사태를 풀겠다는 것이다.

경제논리에 따르면 이는 피할 수 없거나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련의 일들에 대해 만물 생명의 존엄이라든가 휴머니즘적 인간의 자세라든가를 논할 겨를이 없다. 애초 돈벌이 목적으로 낳고 기른 동물 상품을 두고 무슨 존엄성 운운할 것인가. 애초 인간의 먹을거리에 불과한 것들에 휴머니즘 어쩌고 하는 이야말로 재수 없지 않은가. 대강 이런 분위기다.

그러나 시장의 안정을 위해서든 정책의 실효성을 위해서든 농가 소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2, 3등급 소를 낳거나 체형이 작은 암소를 모두 도태시켜야 한다는 행정 논리가 저 잠재된 곳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겨누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자.

비단 이번 한우사태나 현재의 정부 정책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얼굴을 한 인간'이 이윤을 위해서라면 못 할게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짙게 깔린 상황에서 생명에 등급을 매기고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일이 한갓 동물을 향해서만 일어나는가. 우리 또한 삶의 순간순간 여러 비인간적 평가에 처하고, 서로의 존재 가치를 경제능력을 통해 확인 받고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앞서 현대미술가의 도발적 예술 행위가, 현재 글로벌자본주의의 냉엄한 생태계 내부 구성원을 향해 겨눠진 칼날에 비하면 덜 잔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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