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의 목적은 내가 속한 기관의 보안을 위해 밝힐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속한 기관은 정부나 군대나 기업이 아니라 대학이다. 동남아시아의 대학들과 교류 협약을 맺거나 앞으로 협력할 분야를 논의하고 돌아오는 것이 출장의 목적이었다. 도착한 날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동안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 등장하는 거대한 열대 수목들과 그 위로 드리운 더 거대한 열대 구름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때뿐이었다. 사박오일 출장에서 이국의 정취를 누릴 여유는 없었다. 일정이 바빠서인지, 놀 줄 모르는 중년 남자들이어서인지, 동행한 팀장과 나는 동남아의 매혹적인 밤 문화 같은 건 기웃거릴 생각도 않고 일 마치면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각자의 방에서 무료한 휴식을 취했다.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 중정에 마련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갑자기 길이가 손바닥만 하고 온몸이 노란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새는 우리 바로 옆의 화분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나는 팀장에게 낮은 목소리로 "저 새 혹시 벌새 아닌가요?"라고 물었고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벌새가 맞아요."라고 자문자답을 해버렸다. 크기는 작으면서 살짝 굽은 부리가 길었고 날갯짓이 1초에 수십 번은 진동하는 것 같았고 새라기보다는 벌처럼 꽃봉오리 주변을 분주히 수평 수직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녔고 무엇보다 일찍이 내가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입을 헤 벌리고 넋이 빠져 보았던 바로 그 벌새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와 팀장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녀석은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벌새 사진을 찍기 위해 근방을 삼십분 가량 돌아다녔지만 결국 벌새는 찾지 못했다. 대신에 투숙객의 식사자리를 맴도는 시끄럽고 성질 사나운 다른 새들, 죽은 듯 가만히 있다 시선을 옮겼다 다시 보면 그 자리에 없는 도마뱀들도 보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내가 원래 새와 인연이 많은데, 지금까지 온갖 새들을 만났는데, 벌새와의 인연은 너무나 짧았어. 하지만 그 벌새는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날갯짓을 그렇게 하는 새는 처음 봤어. 싱가포르의 벌새는 내가 본 가장 특별한 새로 기억될 거야.' 그리고 나는 또 생각했다. 이번 출장의 꽃은, 성공적인 업무협약 체결이 아니라, 비록 실패했지만 바로 '벌새를 찾아라!'는 미션이었다. 이 이야기를 나는 팀장에게 하지 않았다. 나를 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심 팀장도 나랑 비슷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장에서 돌아와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다. 아무래도 삼십 도가 넘는 기온 차이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연휴 대부분을 이불 속에서 끙끙 앓다가 밀린 일을 하기 위해 애써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문득 싱가포르 벌새가 생각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검색결과에 따르면 벌새는 아메리카 신대륙에만 사는 새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와 팀장이 그렇게 애써 찾아 다닌 그 작고 신비로운 새는 도대체 무슨 새인가? 동화 속 파랑새인가? 나는 그쯤에서 더 이상의 검색을 멈추었다. 최종 결과가 행여나 싱가포르 참새로 나올까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또 생각했다. 뭐 참새면 어떠랴. 그 새가 뭔 새건 그 새는 나에게 '벌새 같은 순간'을 제공해주었다. 벌새 같은 순간이란 어떤 순간을 말하는가. 비록 착각에서 비롯됐을 지라도,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하는 순간, 일상을 모험으로 바꾸는 순간, 직장 동료를 여행 친구로 만드는 순간을 말한다. 그러니 나에게 그 싱가포르의 이름 모를 새는 여전히 진짜 벌새 못지않은 특별한 새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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