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인 다산 정약용은 한국 초기 천주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1846년 조선에 온 5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프랑스 신부 다블뤼가 쓴 <조선 순교사> 에 따르면 정약용은 처음부터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관여했으며 정약용의 두 형인 정약전과 정약종 또한 천주교도였다. 조선>
정조가 죽고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했다. 신유박해(1801년)는 벽파가 남인ㆍ시파를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천주교회 박해 사건으로 정약용과 두 형 역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의금부로 끌려간 형제 중 정약종은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됐다. 잠잠해지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은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었다. 그가 청나라에 보내려던 밀서가 발각된 것이다. 황사영의 배후로 지목된 정약용 형제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또 다시 귀양길에 오른다.
정약용은 신유박해가 있기 전 한 차례 배교한 적이 있다. 다산이 반대파의 비난 속에서도 정조의 신뢰에 힘입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 역시 신유박해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귀양을 떠난 정약용은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다산문답>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같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게다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다산문답>
하지만 정약용이 정말 신을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1874년 프랑스인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 에 정약용이 유배 이후 천주교 신앙 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관련 서적을 썼으며 다산의 장남 정학연도 훗날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26일 밤 10시 방송하는 KBS 1TV '역사 스페셜'이 정약용의 배교 논란을 재조명한다. 한국천주교회사>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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