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나라당은 손님들이 이끌어 간다. 일부에서는 “훈수꾼이 직접 바둑을 둔다” 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당 쇄신과 공천 작업을 주도하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에 참여한 외부 비대위원 6명이 모두 비(非) 당원이기 때문이다.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김종인 이상돈 이준석 조동성 조현정 이양희 비대위원 모두 당원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비대위는 당의 일상적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 역할을 대신한다. 비대위원들은 단순히 당의 자문위원이 아니다. 이들은 당의 정강정책, 국가 주요 정책 등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국회의원 후보 공천 기준을 만드는 일도 이들의 손에 맡겨졌다.
최근 이들은 4 ∙11 총선 때 지역구나 비례대표 의원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순수하게 당무에 참여하겠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당원도 아닌 비대위원들이 총선 불출마 선언도 했으니 이들의 갈 길은 분명해졌다. 한나라당을 위해 조언해 주다가 각자 본업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이들은 집권당 개혁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셈이 된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생각나는 대로 자문해 주고 나중에 책임지지 않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정당책임정치 원리에도 어긋난다.
비대위가 정부의 KTX경쟁 체제 도입 방안에 대해 반대하기로 결정하는 과정도 이 같은 우려를 낳게 했다. 결론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겠지만 문제는 의사결정이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철도 민영화’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는 보고를 받은 지 10여분 만에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수년 동안 이 정책을 추진해온 정부 측과는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대위원들은 “물갈이하자” “바꾸자”를 외치고 있다. 대수술을 하고 변화해야만 당이 살아남는다는 이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다만 손님들이 목소리를 높이려면 국회의원들보다 높은 도덕성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질과 품성은 보통 정치인들과 별 차이가 없다. 한 비대위원은 수뢰 혐의로 구속된 경험도 갖고 있다.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 같은 점을 들어 “주객이 바뀌었다”면서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최근 한 달 동안 비대위 활동은 이렇게 전개됐다.
지난 4년 간 정부여당에 대한 국민 불신이 확산돼 왔으니 바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당을 개혁하자는 게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복지 수요는 급증하는데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고 4대강 사업 등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민심이 떠나갔다는 게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계파 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런 여당이 비대위원들을 통해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절차도 정당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비대위원들은 지금이라도 당원으로 가입해 책임 있게 활동해야 한다.
비당원이 당을 주도하는, 기이한 풍경은 기존 정당 제도의 위기와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근 민주통합당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도 당적을 갖지 않은 시민 50여만명이 모바일 선거인단으로 참여해 승부를 갈랐다. 여야 정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데다 SNS위력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앞으로 우리의 정당 제도 자체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일각에서는 “정당 제도가 박물관 길목에 섰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면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정당 제도는 여전히 존재할 가치가 있다.
SNS시대에도 정당책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 내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모바일 선거인단도 당원으로 가입한 뒤 투표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당원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게 문턱을 확 낮춰야 한다. 여야 정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훈수꾼에 머물지 말고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김광덕 정치부장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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