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경제적 약자를 이렇게 위한 적이 또 있을까. 설을 맞아 정부와 여ㆍ야 정치권이 쏟아낸 이른바 친서민ㆍ복지정책들을 보면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풍성하다.
전국 109개 대학이 평균 4.8%의 등록금을 인하했지만, 대학생들은 여기에 더해 취업 후 학자금 상환 대출(ICL) 금리를 추가로 할인 받을지 모른다. 한나라당 비대위가 이미 3.9%로 인하한 금리를 또 다시 1.9%까지 추가 인하하기 위해 추경예산 편성을 검토 중이기 때문이다. 비대위는 이와 함께 평균 14% 대인 제2금융권 전세자금 대출까지 주택금융공사 보증을 통해 7%로 낮추는 방안도 추진키로 했다.
젊은 부부들을 위한 선물도 푸짐하다. 내년부턴 2세 미만 영유아 자녀를 둔 소득하위 70% 부모에겐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워도 월 10만원의 양육수당이 지급된다. 정부는 올해부터 5세 및 0~2세 영유아 무상보육을 실시키로 했지만, 3~4세 자녀를 둔 부모들과 0~2세 영유아를 집에서 직접 키우는 부모들의 불만에 부랴부랴 혜택을 크게 넓힌 것이다.
재벌과 대기업 친화적 시책을 줄이고, 영세사업자 혜택을 늘리는 정책도 두드러진다. 현 정부 들어 폐지된 출자총액제한제도는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을 막는 쪽으로 보완하거나 부활시키기로 했고, 법인세도 올리자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영세사업자 카드 수수료율은 1.5%대로 낮추겠다는 얘기이고, 야당은 부가세 간이과세 기준도 현재 연 4,800만원 매출에서 8,000만원으로 높여 세금부담을 대폭 줄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사활을 건 여ㆍ야 정치권의 친서민ㆍ복지정책 경쟁은 물론 올해 양대 선거를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정치권 전체가 '표(票)퓰리즘'에 휘둘리고 있다는 냉소적 반응도 만만찮다. 하지만 복지와 세제, 심지어 카드수수료율 같은 '시장질서'까지 뒤흔들고 있는 최근의 과감한 경제시책들은 단순한 선거용을 넘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인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1990년대 이래 분배구조가 악화하면서 성장보다는 공정한 수익 배분이 중요하게 됐다. 극심한 경제 양극화와 중산층의 몰락, 고령화 등 사회적 변화 역시 재정의 소득재분배 기능과 복지 강화 요구로 귀결됐다. 결국 정책과 세제, 재정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국가의 역량이 성장에 집중됐던 고도성장기 이래의 국가 운영 패러다임 자체가 전면 수정돼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권의 친서민ㆍ복지정책 경쟁은 새로운 정치를 향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도성장기 이래 가장 격렬한 변혁을 모색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오히려 정치 불신은 높아지고, 심지어 설 전엔 "정치인은 다들 도둑놈이고 싸움꾼"이라는 한 야당 정치인의 트위터 한탄이 무슨 고해성사라도 되는 듯 호응을 얻으며 나돌았을 정도다. 대체 그토록 푸짐한 설 선물을 풀어낸 정치권의 구애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 전에 만난 한 지인은 "정치가 어느새 이해 당사자들의 눈치나 살살 살피는 강아지 꼴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과정'이라고 한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의 말을 들며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가치나 자원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배분할 수 있는 권위와 신뢰를 상실한 것"이라고 했다.
현대 정치에서 정치적 권위는 선거를 통한 지지에서 나오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무엇보다 국리민복에 대한 진지한 비전을 갖고 최종적 이해 조정자로서 국민을 이끌고 설득하려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정치는 트위터에 치고 인터넷 댓글에 휘둘리면서 대책 없는 선심으로 국민을 기만하는데 급급한 모습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난국을 헤쳐나갈 책임과 권위를 다시 세울 큰 정치가 새삼 아쉬워진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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