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돌을 정으로 쪼거나 펄펄 끓는 청동 액을 석고 틀에 부어 굳힌 것만이 조각은 아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지듯 조각도 마찬가지. 가는 머리카락을 연결해 그물주머니처럼 만들어 놓은 함연주 작가의 '큐브'와 종묘에 내리는 청량한 빗소리를 천장에 매달린 60여 개의 스피커가 전하는 김기철 작가의 '소리보기-비' 역시 조각의 범주로 들어왔다.
한국 조각을 대표하는 국내 작가 22인의 작품 22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각의 현재를 보여주는 '한국조각 다시 보기-그 진폭과 진동' 전이 서울 방이동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박숙영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가 외부 기획자로 참여한 이번 전시는 조각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인체에서 몸으로', '독립적인 물체에서 환경으로', '매스에서 마티에르로', '정주에서 이동으로' 등 현재 조각이라 불리는 작품의 변화를 다소 추상적인 네 개의 테마로 분류했다.
'인체에서 몸으로'에서는 인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 않고 작가의 내면 혹은 시대적 사유에 따라 달라지는 몸의 변화를 형상화한 작품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양쪽의 귀가 온전한 김종영 작가는 '자각상'에서 고흐처럼 한쪽 귀를 없앴다. 구본주 작가의 '눈칫밥 30년'은 바닥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피는 노년의 얼굴을 통해 회사와 가정에서 편할 날 없는 이 시대 아버지들을 은유한다.
'독립적인 물체에서 환경으로'에는 조각에 대한 인식을 뒤엎는 작품들이 대거 선보였다. 공간을 꽉 채우는 3차원의 덩어리 대신 소리와 빛, 움직임, 그리고 관람객의 참여가 전시장을 채운다. 과거 조각가의 시각이라면 미니어처 피라미드를 전시장 안으로 들여왔겠지만, 김태곤 작가는 형광색을 칠한 가느다란 낚싯줄로 거대한 피라미드 형상을 만들었다. 캄캄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형광등을 켜면 마법처럼 눈앞에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파란색 자동차, 춤추는 여인, 앉아 있는 아이를 커다란 벽면에 음각한 이용덕 작가의 '아엠 낫 익스펜시브'는 보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작품과 마주하고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걸으면 작품 속 인물과 물체가 일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조각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번 전시는 2월 26일까지 열린다. (02)425-1077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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