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남한까지 왔는데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요. 돈을 벌어야 하니 자식을 기를 여유는 더욱 없겠죠. 그런 엄마들을 위해 아이들을 맡아 기른 게 벌써 2년이나 됐네요. 설 명절에는 엄마와 아이들을 수녀원에 초대해 차례도 지낼 겁니다."
설을 이틀 앞둔 20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한 오피스텔 지하 1층 작은 방. 이근순(51)ㆍ문정은(45) 수녀는 4세에서 7세에 이르는 여섯 명의 새터민(북한이탈주민) 아이들 점심상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작은 식판에 김치와 파래, 우동, 생선이 놓이자 아이들은 어설픈 숫가락질을 해댔고, 이 수녀는 생선 가시를 손수 발라줬다. 모두 여덟 식구가 모여 24시간 오순도순 생활하는 이곳의 이름은 '성모 소화의 집'이다. 자녀만 홀로 데리고 남쪽으로 온 여성 새터민 자녀 양육을 도와주는 그룹 홈이다.
두 수녀가 아이들과 인연을 맺은 건 2010년 4월이다. 재단법인 파티마의 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 소속으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던 중 새터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북한 출신 어머니와 아이들을 소개 받으면서부터다.
"새터민 중 여성들의 생활은 더 힘들어요. 중국에서 언제 북으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 속에 수년 간 인신매매, 성범죄, 노동착취를 이겨내고 가까스로 한국에 와도 의지할 사람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겁니다. 이들의 친정 엄마,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문 수녀의 설명이다.
수녀들의 뜻에 공감한 한 지인의 도움으로 성모 소화의 집은 16㎡ 정도 되는 소박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공간이 협소해 중간에 구조물을 만들어 두개 층, 33㎡ 넓이로 사용하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려면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수녀는 "식료품, 학용품, 옷 등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추운 겨울엔 난방비가 모자라 아이들이 감기를 달고 사는 게 제일 걱정"이라며 "종종 얼굴 없는 기부자들이 문 앞에 생필품 등을 놓고 가 요긴하게 쓰고 있다"고 전했다.
하루 종일 집에 머무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사람 냄새'다. 아이들의 엄마들은 인천, 경기 평택, 충남 아산의 공장과 식당에서 일하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아이들과 마주한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엄마의 공백을 채워주곤 한다. 2년째 이곳을 찾고 있다는 고교생 이예지(17)양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종종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 놀기도 한다"며"아빠가 없고 엄마와도 떨어져 살아 구김살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에서 내가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많은 보살핌으로 아이들도 차츰 안정을 찾고 있다. 엄마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난 윤아영(가명ㆍ6)양은 처음엔 두 수녀와도 낯가림이 심했다. 하지만 이 수녀는 "이제 아영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말을 배우려 든다"고 전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태국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태어났다는 김민우ㆍ연우(가명ㆍ4) 쌍둥이 형제도 이 집에 적응하면서 성격이 밝아졌다.
"얼마 전 한 아이가 '우리는 누가 태어나게 했어요'라고 묻더군요.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한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세상으로부터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이 충만하도록 해줄 겁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두 수녀의 미소는 외할머니의 그것과 어느 새 닮아 있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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