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 주는 것을 배우는 학교'
지난해 연세대가 대한민국 참교육 대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식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이다. 사실 이 말은 그때만 한 것이 아니다. 지난 4년 동안 연세대 총장으로 봉직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과 교수 그리고 직원 앞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것은 나의 교육철학이자, 연세대가 지켜온 전통이었다. 배운 바를 남 준다고 자기 배움이 닳겠는가. 도리어 늘어날 것이다. 기회를 뺏겼다고 성말라 하지 않으면, 희생하고 양보하며 기다리다 보면, 우리 앞에 더 큰 기회가 찾아오더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상은 나의 믿음만큼 깔끔하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학에서 책임을 맡았던 한 사람으로서, 학교가 경쟁에서 이기는 교육만 해오지 않았나, 되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오로지 '모 아니면 도' 식의, 지나치게 조급한 방식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태 속의 젊은이를 키우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요즘 문제가 되는 CNK 사건이 그렇다. 가진 자가, 배운 자가, 그래서 먼저 정보를 얻은 자가 다른 사람에 앞서 이익을 챙기려고 한 사건이다. 누가 저들을 그렇게 가르쳤을까.
그들은 대부분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다. 자신의 영달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이들이다. 좋은 학교에서 많이 배웠으니, 때가 되면 봉사와 환원의 의무를 실천하리라 기대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올해는 우리 사회 전체의 흐름에서 거대한 변화가 밀어닥칠 것이다. 심각해지는 양극화 현상과 민심의 동요 속에 총선과 대선이라는 큰 정치 행사가 치러진다. 교육 분야에서도 반값 등록금과 비리ㆍ부실 대학의 정리와 같은 표심을 자극할 수 있는 정책과 구호가 남발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바람이 극단적이고 조급한 선택을 강요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어떤 문제이건, 조금 더디더라도 천천히 살피고 두루 밟아 나가야 안전하고 완벽하다. 얽힌 실타래는 하나하나 풀어가야 한다.
우리 속담에 '담은 굼벵이가 잘 쌓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굼벵이는 동작이 느리고 미련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그런 굼벵이한테 어쩌다 이런 좋은 말이 붙었을까. 옛날 토담은 흙을 개서 쌓는데, 한 층을 쌓고는 그것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위층을 쌓아 올려야 한다. 부지런한 사람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한다.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위층을 올리니 뭉개져 내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은 담을 쌓지 못한다. 이것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느림보 굼벵이는 느긋하다. 그러니 한 층이 다 굳은 다음에야 천천히 위층을 올린다. 게으른 천성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일이 되도록 하는, 그 경우와 절차를 따지는 것이다.
빠른 속도가 성공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일에서는 기다림도 필요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 하더라도 쾌도난마(快刀亂麻)식으로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는 없다. 우리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졌기에 더욱 그렇다. 의견이 극심하게 갈릴 때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경청과 대화와 양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다 보면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이것만큼은 게으른 굼벵이의 느긋함을 따라야 한다. 우리 사회 안의 소통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덕목은 올해 그리고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매우 절실하다.
대한민국 교육, 특히 사학이 우리 사회의 더 큰 발전을 위해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세상의 무게중심이 되기를 나는 소망해 왔다. 대학의 총장을 그만두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에 대한 관심만큼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배워서 남 주는 굼벵이의 교육 철학을 가지고 말이다.
김한중 연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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