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본 임진왜란/김시덕 지음/학고재 발행ㆍ240쪽ㆍ1만5000원
1905년 러일전쟁 최대 해전에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관이 무적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그런데 도고는 이순신을 존경했단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흔히 하고, 그래서 그걸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릎 탁 치며, '그래 이순신 장군은 적들마저 존경한 영웅이야' 하고.
<그들이 본 임진왜란> 을 쓴 문헌학자인 김시덕 고려대 연구교수는 유명한 이 이야기를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전설이라고 말한다. 만약 도고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 목적은 '도고 자신이 적군의 영웅까지도 인정하는 넓은 도량을 가진 영웅임을 과시하는 데 있었을' 게 틀림 없다고 한다. 그들이>
사실(史實)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는 더욱 사실(事實)대로 기억되지 않는 법이다. 어디에선가, 어떤 목적으로 왜곡이 생겨나고 그 왜곡된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널리 퍼지는 게 '사실'이다. 이를 검증하고 바로 잡아 알리는 것이 역사학자의 책임이고 교육의 역할이라고 해야겠지만, 진실을 밝히는 건 쉽지 않고 밝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알고 믿는 것도 아니다. 역사에 대한 집단 기억 속에는 이렇게 왜곡됐지만 널리 전파된 정보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은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시간대별로 좇아가며 17~19세기 일본 문헌 등을 통해 살핀 책이다. 당연히 한국인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임진왜란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들이>
'예부터 중국은 우리나라를 여러 번 침략하였으나 우리나라가 외국을 정벌한 것은 신공황후가 서쪽 삼한을 정벌한 이래 천 년 동안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선언문이다. 임진왜란은 원ㆍ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략에 복수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며, 적어도 다수의 일본인은 이 같은 명분 아닌 명분을 믿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과정에서도 가토 기요마사 같은 선봉 장수는 끊임없이 영웅으로 그려진다. 생포한 왕자 일행과 함경도 주민을 잘 보살폈고 심지어 조선 국왕이 그를 '군자 중의 군자'라고 했다느니, 승려를 몰래 가토 진영에 보내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남대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17세기 후반까지 명ㆍ일본 문헌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쓸 만한 조선인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런 풍토가 바뀐 것은 <징비록> 의 일본판인 <조선징비록> 이 간행되고 이 내용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한 <조선태평기> <조선군기대전> 이 나오면서부터다. 임진강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유극량을 비롯해 송상현, 류성룡, 신각, 곽준, 곽재우 등의 활약이 대서특필되고 이순신에게는 아예 '영웅' 호칭까지 붙는다. 물론 '이순신과 같은 조선 영웅을 이긴 일본 장군은 더 위대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조선군기대전> 조선태평기> 조선징비록> 징비록>
저자는 '근세 일본 사회의 임진왜란상을 결정지은 것은 고문서가 아닌 서적'이라며 일본 에도(江戶) 시대 200여년 베스트셀러였던 <다이코기(太閤記)>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조선정벌기>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유행한 장편 역사소설 <에혼(繪本) 다이코기> 등을 주요 검토 문헌으로 활용했다. 에혼(繪本)> 조선정벌기> 도요토미> 다이코기(太閤記)>
일본인들이 자기네 식으로 요리한 임진왜란 이야기 세트에 약간의 소화불량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많은 문헌 속 이야기를 엮고 있어 어지럼증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대중이 어떤 시선으로 임진왜란을, 당시의 조선을 보았는지, 현재 일본 사회에는 한국에 대한 어떤 집단 정서가 흐르고 있는지를 알도록 도와주는 것만은 틀림 없다. 일본에서 먼저 나온 이 책은 지난해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이 제정해 40세 미만 일본 고전문헌 연구자에게 주는 제4회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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