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당시 27세의 청년 김신조(71)씨는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31명의 무장공비 중 한 명이었다. 당시 46세의 예비역 소장이었던 윤봉주(90)씨는 최전방 부대인 육군 25사단 사단장이었다. 44년 전 그 날 한 명은 북의 지령을 완수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저항하다 생포됐고, 다른 한 명은 그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들이 19일 경기 연천군 25사단에서 44년 만에 마주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고 내뱉었던 청년은 귀순해 목사로 활동 중이고, 꼿꼿했던 군인은 어느새 100살을 바라보는 노신사가 됐다.
25사단이 1ㆍ21사태를 잊지 않기 위해 지난해부터 마련한 '리멤버(Remember) 1ㆍ21' 행사에 초청된 윤씨는 장병들 앞에서 당시를 회고했다.
"대남공작원 31명이 25사단 지역을 지나 남하했을 때 이들을 잡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돌이켜보면 1968년에는 36차례나 대간첩 작전을 펼치는 등 단 하루도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없다."
김씨 때문에 오명을 벗게 된 것과 강도 높은 훈련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윤씨는 "김씨가 생포된 뒤 25사단이 아니고 '미 2사단 관할인 경기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로 넘어왔다'고 진술해 (대북경계를 제대로 못했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 사건 뒤 우리 사단 전 장병은 겨울에 내복도 입지 않고 양쪽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채 70㎞ 행군을 했다"며 "지금 장병들이 입고 있는 군복은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다. 선배들의 땀이 배어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사단장을 만난 김씨의 소회도 남달랐다. 생포 뒤 마주쳤을지는 몰라도 윤씨와 대화를 나눈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김씨는 "윤 선생님도 나와 같은 함경북도 출신이고, 내가 남하하기 1주일 전에 25사단장으로 부임해 고초를 겪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북한군은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언제든 다시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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