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줏돈 받을 때 빼고 조선의 풍습을 아름답게 여긴 적 있으신지. 명절이 되면 숫제 웬수 같다. 길은 왜 이리 막히고, 챙겨야 할 피붙이는 왜 그렇게 많고, 면식도 없는 조상님 흠향하실 전은 왜 나더러 뒤집으라는 건지. 착한 며느리, 든든한 사위인 양 표정 연기하는 스트레스는 덤이다. 양반 고장 안동으로 가면서 그런 갑갑함이 사람들 몸 속에 사리로 맺혀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동네 양반들, 지레짐작과는 상당히 달리 살고 있었다. 느긋한 얼굴에 언뜻 비치는 건 아마도 설을 맞는 즐거움(!). 명절에 지친 이라면, 한번쯤 종갓집 툇마루에 앉아 얘기를 들어볼 일이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실(박곡리) 지촌종택. 조선 숙종 때 대사성과 대사간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을 현조(顯祖)로 하는 의성 김씨 집안의 종갓집이다. 불천위(不遷位) 제사까지 모시지는 않지만 1년에 제사가 열 번, 명절 차례까지 치면 한 해 열두 번 지방을 쓰고 제기를 닦는 집안이다. 임하댐 건설로 본래 지례마을이 수몰되자 1988년 산중턱의 현 위치로 옮겨왔다. 홑처마를 곱게 인 팔작기와집이 짧은 겨울 햇살을 담은 호수를 고즈넉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13대 종손 김원길(70)씨와 종부 이순희(65ㆍ사진)씨가 불청객을 반갑게 맞았다.
"스트레스? 뭔 포시라운(속 편한) 소리를…"
뼈대 있는 집안의 명절 준비가 힘드시지 않냐는, 미처 표현을 다듬지도 못한 무람없는 질문에 대한 종부의 대답은 이렇게 시작됐다. 봉제사는 집안의 근본이며 반가의 여인이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의무라는, 왕조실록의 한 대목 같은 말이 이어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동서들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연예인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밤이 새는지 모르고 놀아요." 강원도 억양이 살짝 섞인 듯한 북부 경북의 독특한 리듬으로, 종부는 종가의 명절 분위기를 설명했다.
"종가라고 해서 명절 준비가 힘들고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더 간소하게 하지. 합리적으로 해야 하고. 맛있는 거 해서 서로 나눠먹고 즐겁게 놀고, 양반집 제삿날은 원래 그런 날이래요."
종손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는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맏아들이 멀리 나가 살지 못하게 했단다. 그런데도 명절과 제사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척 개방적이다.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 받으면서까지 복잡한 옛 법식을 고집하는 건 꼴통이야. 세월이 변했으면 형식도 변해야지. 정신은 지키지 못하면서 형식만 고집하는 건 허세예요. 진짜 안동 양반들은 그렇게 안 해. 박통 때 자정에 지내던 제사를 일몰 후로 당겨서 지내라는 말에 제일 먼저 '그게 옳다'고 한 게 여기 양반들이거든."
뼈대 있는 집안 종손과의 대화. 학교 폭력 같은 사회 문제도 대가족의 질서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현상이라는 종손의 현실 인식은, 안동의 핏줄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번지더니, 박통과 일제 강점기를 더듬으며 퇴계와 학봉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구수한 얘기 속에 어느덧 해가 뉘엿거렸다. 저녁상을 볼 요량인지 종부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봉제사와 함께 몸에 밴 자연스러운 접빈객의 태도. 아내의 빈 자리를 보다가 종손이 깜빡 잊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참. 왜 봉제사가 여성의 지위를 억압하는 제도라고 얘기들 하잖아예. 근데 절대 그렇지 않애여. 차례나 제사 지낼 때 보면 초헌(初獻ㆍ첫잔을 올리는 제관)이 종손이고 아헌(亞獻ㆍ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은 반드시 종부야. 종부가 아무리 초등학교밖에 못나왔다 캐도 괄세할 수 없는 거래. 우리 전통에서 주부의 지위가 본래 그래요. 그래서 옛날엔 주부들이 은근히 명절을 기다렸다니까. 평소 잘난 척하는 친지들도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되니까."
여행수첩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서울과 부산 쪽에서 모두 3시간 안에 닿을 수 있다. 전통 유산이 많아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다. 7일 전까지 안동관광정보센터 홈페이지(www.tourandong.com)에서 신청하면 된다.
●외부인들에게 개방된 종택과 고택이 안동시내에 10여곳 있다. 임청각(www.imcheonggak.com),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www.tapdong.com), 안동군자마을(www.gunjari.net) 등에서도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다. 안동관광정보센터 (054)856-3013.
안동=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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