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역 인근 중구 중림동의 한 다세대 주택 1층. 20평(66㎡) 남짓한 공간의 긴 테이블 앞에 중년 남성 10여명이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의 일은 종이 쇼핑백 제작. 한쪽에선 종이를 접어 붙이는 작업이 한창이고 반대편에서는 쇼핑백에 구멍을 뚫고 끈을 끼우는 일에 열중이었다. 얼핏 보면 여느 중소기업 작업장 같지만 조금 특별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다. 직원은 모두 노숙인, 사장은 이들을 돌보는 쉼터 '소중한 사람들'의 회장 유정옥(56)씨다.
유씨가 노숙인 작업장을 마련한 것은 지난해 10월. 교회 목사인 남편과 함께 2004년부터 서울역 노숙인에게 아침밥을 제공하고, 역 근처에서 노숙인 쉼터를 운영해 오면서 노숙인의 사회 복귀를 위해선 일자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이라고 왜 일하고 싶지 않겠어요. 하지만 오랜 바깥 생활로 심신이 망가진 상황에서 금방 일에 적응하긴 힘듭니다."
그래서 유씨는 구로구의 한 상가 건물에 조그만 공간을 얻어 개당 50원을 받는 쇼핑백 생산 작업장을 열었다.
특별한 일터인 만큼 경영 방식도 남달랐다. 적자가 얼마가 나든 시급 3,000원을 보장하는 원칙을 세운 것도 그 중 하나다. 당시만 해도 작업자 1인당 평균 생산액이 시간당 940원 정도에 불과해 유씨는 매달 400여 만원의 손해를 보기도 했다. 또 노숙인에게 동기부여가 되도록 매주 토요일이면 임금을 받아갈 수 있도록 주급제를 적용했다. 작업반장으로 통하는 백영민(39ㆍ가명)씨는 "회장님이 처음에는 시급 4,500원에 맞춰 줬는데 우리도 양심상 다 받을 수 없어 먼저 3,000원으로 낮춰달라고 했다"며 쑥스러워 했다.
적자 운영을 감수할 수 있었던 건 유씨의 인세 덕분. 유씨는 2004년 출간해 70여 만권이 팔린 에세이집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 행복하다'의 인세로 이를 감당하고 있다.
이런 때문인지 노숙인들도 갈수록 열과 성을 다하는 분위기다. 유씨는 "작업장을 처음 열었을 때 하루 400개에 불과했던 작업량이 지난달엔 1,500개로 부쩍 늘었다"며 "불량률도 10%에서 최근 1% 밑으로 떨어져 쇼핑백 개당 단가를 150원 쳐주겠다는 업체까지 나타났을 정도"라고 말했다. 노숙인 김부영(41)씨는 "아침마다 갈 곳이 생겨 신이 난다. 처음에는 한곳에 앉아있는 게 불안했다. 이제는 안정되고 희망도 생겼다. 앞으로 기술을 배워 취직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건물주가 "작업장에 노숙인들이 드나들어 집값이 떨어진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이들은 지난달 구로의 작업장을 떠나 쉼터 근처 작은 공간으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유씨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다행히 얼마 전 쉼터 부근에 3층짜리 건물이 나와 들어가게 됐어요. 아래층은 일터, 위층은 쉼터로 쓰는 국내 첫 '작업장형 노숙인 쉼터'를 만들 계획입니다. 이곳을 거쳐간 분들이 모두 사회에 적응해 앞으로 제가 할 일이 없어지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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