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일본은 힘이 좀 빠졌고, 중국은 한국을 쫓아오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던 5년 전의 언급과는 딴판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2'를 참관,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삼성전자의 힘을 확인한 다음이니 그 정도의 자신감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삼성전자는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부동의 선두주자 자리를 굳혔고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지난해 애플을 제쳐 한때 무성했던 위기론을 씻어냈다. TV를 포함한 다른 전자제품도 일본을 따라잡았고, 품질ㆍ기술 혁신을 위해 더 이상 손 벌릴 일도 없어졌다. 도쿄 아키하바라에 연구소를 두고,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분해해 살피던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그런 대역전극의 중심인 삼성전자라면 일본의 약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더는 일본에 배울 게 없다"고 확대 해석할 수 없음은 이 회장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하다. 수시로 일본을 방문하는 그는 CES 참관 뒤 귀로에도 일본에 들렀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그가 온천 휴양이나 식도락을 위해 시간을 쪼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의 뇌리를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국제전시회에 나온 제품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일본의 무엇을 현장에서 살피고 느껴 상상력을 자극 받자는 뜻이리라.
그러니 일본 따라잡기에 성공한 전자산업이나 거의 따라붙은 자동차 산업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덩달아 일본의 약세를 논하거나 배울 게 없다는 지레짐작에 흐를 게 아니다. 부품ㆍ소재 분야의 기술 경쟁력은 물론이고,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기업문화'측면에서도 아직 배울 게 많다.
한국 산업계가 공들여 배우고, 모방하고, 따라잡아야 할 일본산업의 대표적 강점은 환율 변동 대처 및 에너지 절감 능력이다. 일본 엔화는 1973년 변동환율제 전환 이래 끊임없는 절상을 겪었다. 주기적 등락은 거듭됐지만 엔화는 75년 달러 당 300엔 대에서 78년 11월 177엔 대로 뛰었다. 95년 4월에는 79엔 대까지 치솟았다 98년 8월 달러 당 147엔 대로 바닥을 찍을 때까지 3년 여 혹독한 엔고를 겪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일본 산업은 놀라운 '환율 내성'을 획득했다.
지난해 10월 사상 최고가인 달러 당 75엔 대를 기록한 '슈퍼 엔고'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대지진과 해일 피해까지 겹쳤는데도 산업 붕괴 조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두 차례 석유 위기를 겪으며 국가적으로 연구개발에 매달리고 산업계가 적극 동참, 일찌감치 세계 정상에 이른 에너지 절감ㆍ효율화 기술은 한국 산업이 다시 한 단계 도약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비다.
배움이 요구되는 것은 산업계만이 아니다. 거품 붕괴에 따른 금융위기와 장기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과정에 일본이 동원한 정책 수단은 오랫동안 구미 정책 당국자들의 힐난을 샀다. 그러나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세계 경제 위기에 대응하면서 구미 당국자들은 일본의 정책수단 상당수를 그대로 흉내 낼 수밖에 없었다. 공적자금 투입에 의한 금융기관 구제가 대표적인 예다.
프린스턴대의 폴 크루그만 교수는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현실과 그때 어떤 정책이 효과적이고, 무엇이 효과적이지 않은지를 미리 보여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교사나 반면교사 모두 가르침을 준다. 잇따라 동원한 온갖 정책수단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는 침체의 수렁에 빠져 있다. 최소한 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는 일본에 배울 게 있다. 더욱이 연말 대선을 겨냥해 정책공약 개발에 열심인 정치 지도자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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