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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구두를 신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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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구두를 신고 잠들었다

입력
2012.01.18 12:05
0 0

강성은

잠 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 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 구두를 벗는다는 것은 집에 왔다는 징표. 아파트 복도나 보도블럭에 누워 잠든 취객이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확실히 그래요. 그런데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린 계속 구두를 신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강가나 절벽에서 투신한 사람이 덩그러니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그래요. 구두를 신고 잠이 드는 일은 어떤가요? 잠 속에서도 걷고 있는 피곤한 기분일지, 혹은 끝없는 도보여행을 즐기는 방랑객의 기분일지? 그 구두는 무쇠구두인지 깃털구두인지? 베를렌느는 랭보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구두라면 신고 잠들만 하겠네요. 하얀 발가락들 사이로 미풍이 불어오는 느낌이겠지요. 경쾌해진 그 발걸음이 우리에게도 허락되기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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