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이면서 연말이다. 연초의 연말은 서력기원과 단군기원이라는 이중의 역법에서 관습적으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해마다 맞게 되는 현상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로 인한 약간의 혼란이나 불편함이 있다 하더라도, 올해 곧 닥쳐올 이중의 선거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선거전쟁이란, 그리고 그 결과란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양력의 새해 분위기도 음력의 세밑 분위기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총선과 대선 두 차례의 결전을 눈앞에 둔 정치권의 부산한 움직임을 제외하면 더욱 그러하다. 겨울 초저녁의 바람처럼 스산하고 싸늘하게 침체된 기운만 감돈다. 개개인의 구체적 삶에 그만큼 희망이 사라졌다. 공업화, 산업화, 자본화에 이어 세계화로 치닫는 숨가쁜 경주 속에서, 한때 모든 국민은 그 선두의 꿈이 자신의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정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시대의 조류라는 초특급열차는 그 속도만큼 경쟁을 강요하고, 경쟁은 앞쪽과 꽁무니의 격차를 점점 벌렸다. 다수의 국민은 저마다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가난만 자기의 것으로 지니게 되었다.
그 불만과 분노의 화살은 정치를 겨냥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의 구조나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치나 정치가가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는 다음의 주제고,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정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다 보니 제각각 필요한 계산은 경제에서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정치에 대고 물었다. 경제적 양극화는 어느새 정치적 의사의 양극화로 전이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극심한 빈부의 차이보다 극단적인 편가르기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진보나 보수는 실질을 드러내는 객관적 지시어가 아니라 싸움을 위한 양대진영의 소속을 표지하는 감정적 수식어에 더 가까웠다. 싸움의 목표는 승리고, 유일하게 가치 있는 전리품은 정권이었다. 모든 정치의 기획과 활동의 구심점은 개헌 이후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이었다. 총선이나 지방선거는 다음 대선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에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그것이 과거 25년을 이어온 경제적-정치적 양극화 쌍곡선의 역사다.
이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두 개의 전쟁을 연이어 치러야 한다. 모든 정치세력들이 준비에 바쁜데, 5년 전 격전장의 주역이었던 당명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민주통합당은 기선을 제압하고 나섰다. 여세만 끝까지 몰아가면 결과는 압승이라는 기분이다. 한나라당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구의 명칭이 원래 그런 각오를 상징한다. 통합진보당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도 자기 자리를 눈여겨 보고 있다. 현실의 삶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나, 바로 앞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새로운 정당의 구성에 모바일 투표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
선거를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부적절하거나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어차피 삶은 싸움이고, 정치도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어떻게 싸우느냐의 문제다. 민주주의는 바로 선거전이다. 여기서 모두가 선거전쟁의 당사자인 우리는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원칙 하나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가장 단순한 데서 시작해보자. 어떤 의미에서건 선거를 싸움이라 전제한다면, 그 싸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싸움의 목적은 어디에서나 승리다. 싸움에서 불변의 원칙이다. 하지만 승리만을 목표로 한 싸움은 지난 25년의 과거 궤적의 한 사이클을 반복하는 데 불과하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목표부터 달라야 한다. 어떻게 이기느냐가 일차적 목표라면, 어떤 승리를 얻을 것이냐가 궁극적 목적이어야 한다.
패배자가 된 상대를 배제하지 않는 승리, 지난 패배를 복수하는 수단으로서의 승리가 아닌 승리를 목표로 해야 한다. 상대의 결점 때문에 줍는 승리가 아니라, 나의 장점으로 얻는 승리여야 한다. 그런 승리가 우리편만이 아닌 우리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싸움에 나서기 전에, 지금부터 모든 진영의 진정한 목표점 하나는 그것이어야 한다.
차병직 변호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