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싣는 목재선, 쇳덩이 싣는 철강선, 기름 싣는 유조선 중 어느 배가 더 안전해 보이는가. 유조선 철강선 목재선 순으로 안전하다면 다소 의외일 듯하다. 철강은 배의 밑바닥에, 원목은 갑판 위에 주로 싣게 되므로 화물선 전체의 무게중심 때문에 풍랑이 일 경우 철강선보다 목재선이 쉽게 뒤집힌다는 점은 이해가 된다. 기름 덩어리와 같은 유조선은? 무게중심으로 보거나 기름의 착화점(불붙는 온도)을 감안하면 사고가 날 소지가 별로 없다. 문제는 유증기(油蒸氣)다.
■ 15일 인천 자월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유조선 폭발은 유증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의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배가 두 동강이 났지만 뒤쪽에 실려 있던 벙커C유 80톤과 경유 40톤이 안전하게 남았다는 대목은 유증기의 위험성과 석유의 안전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기름에서 증발한 기체인 유증기는 담뱃불은 물론 옷과 머리카락의 정전기로 발생하는 조그만 스파크만 있어도 쉽게 점화되고 폭발한다. 유증기만 없다면 휘발유도 섭씨350도 이상이 되지 않으면 불이 붙지 않는다.
■ 유증기 때문에 발생한 화재와 폭발 사고는 연간 60~70건에 이른다. 2008년 경기 이천시의 냉동창고 화재, 2008년 서울 마포구 대형음식점의 폭발 등이 대표적이지만 석유난로를 쬐던 사람이 목도리에서 발생한 정전기 스파크로 화상을 입은 경우도 있었다. 유증기는 온도가 높고 공기가 건조한 상태에서 많이 발생하고, 밀폐된 공간에 쌓여 있다가 점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석유 계통의 연료성 기름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식용유에서도 유증기는 발생한다.
■ 유류의 화재와 폭발 방지는 당연히 유증기를 얼마나 신속히 제거하느냐에 달렸다. 주유소 주유기 끝엔 의무적으로 유증기 회수장치를 부착토록 돼 있어 유증기가 생기는 순간 액체로 되돌려 저장한다. 주유소는 기름을 절약하고 고객은 몸에 나쁜 냄새를 피할 수 있는 셈이다. 유조선이나 저유소 등에 이러한 장치가 없을 리 없지만 유증기의 위험성을 깜빡 잊는 바람에 사고가 나는 것이다. 건조한 겨울, 난방이 충분한 실내라면 식용유의 유증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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