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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석궁 테러와 빗나간 엑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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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 석궁 테러와 빗나간 엑소시즘

입력
2012.01.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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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TV 에선가, 엑소시즘을 소재로 삼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무속인 등 퇴마사들이 악령을 퇴치한다고 애쓰지만, 그 악령 현상이란 게 애초 정신분열에 따른 환각이 아닌가 싶었다. 이걸 모른 체하며 엑소시즘 흉내를 내는 것이 우스웠다. 분별없는 상업방송이지만 정신치료가 급한 사람을 내세워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은 범죄 행위다.

영화'부러진 화살'을 미리 보면서 빗나간 엑소시즘을 떠올렸다. 일부러 시사회를 찾은 것은 "석궁 테러 사건을 통해 사법부를 고발했다"는 홍보 캠페인의 근거가 궁금해서다. 사회 고발 문제작을 여럿 연출했다는 감독이 대법원 판결과 다른 진실을 밝혀내기라도 한 양 떠드는 게 의아했다.

첫 머리 석궁 테러 장면에 등장하는 주역 캐릭터부터 실제와 거리 멀다. 불안한 가해 대학교수 역할을 늘 편안한 국민 배우에게, 반대로 피해 부장판사 역은 음흉한 악역 배우에 맡긴 것은 법정 실화물의 정석을 뒤집었다. 선량한 피고인, 나쁜 판사의 선입견을 주기 쉽다.

영화는 '법정 실화' 간판이 무색하다. 공판기록과 사실에 입각해 각본을 쓰고 캐릭터를 설정했다는 감독의 말과 동떨어진다. 엇갈린 주장과 사실이 재판에 어떤 의미가 있고, 법적으로 옳고 그른지 일깨우는 설명은 없이 등장인물들의 황당, 코믹 언행으로 얼버무린다. 객관적 법률가의 성실한 자문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사건의 발단인 대학교수의 재임용탈락 무효소송을 길게 되새길 겨를은 없다. 다만 패소 판결한 항소심 주심판사가 진보성향의 유명한 이정렬 판사라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석궁 사건 뒤 그는 판결문을 쓴 주심판사로서 깊이 고심한 판결 배경을 밝혔다.

이 판사는 "판결의 기본구도는 학자적 양심은 있으나 교육자 자질을 갖지 못한 사람의 재임용 탈락이 적법한지 여부"라고 설명했다. 그 교수는 입시 출제 오류를 지적, 학교와 맞선 탓에 보복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갖가지 일탈 언행에 관한 증거를 토대로 교수 자질과 품위를 정한 재임용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에 따르면, 교수는 사법부를 불신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또 불리한 증언에 반대신문도 하지 않고"출제 오류 지적은 옳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당사자가 입증한 사실만을 근거로 판결하는 민사소송 원칙을 좇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석궁 사건 재판을 그린 영화의 몸통도 엄격한 법리와 거리 먼 수학교수의 '독학 법리'주장과 괴짜 변호사의 법정 밖 변론이 두드러진다. 재판의 핵심은 범행 현장에서 체포된 교수의 행위에 고의성이 있는지 여부다. 그는 몸싸움 도중 우발적으로 화살이 발사됐다고 항변했다. 그러다 목격자가 보았다는 부러진 화살이 검찰 증거에 없고, 부장판사의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는 점 등을 들어 판사가 자해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회칼까지 준비한 정황 등에 비춰 고의성이 충분하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교수는 법원이 혈흔 감정 등을 거부한 것을 근거로 "이게 재판이야, 개판이지"라고 외친다. 일부 언론도 의혹에 매달렸다. 변호사의 언론 플레이를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러진 화살과 혈흔 없는 와이셔츠는 대법원까지 일치된 유죄 판단에 중요한 요소가 못 된다. 석궁에 상해를 입은 명백한 증거를 넘어설 수 없다. 사족이지만, 부장판사의 노모는 아들이 병원에 실려간 황망 중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와이셔츠를 찬물에 빨았다고 한다.

요란한 영화 홍보에 법원은 침묵하고 있다. 사법부 개혁 요구에 맞서는 모양을 꺼릴 법하다. 이런 와중에 영화의 주인공은 황당한'법전 공부'를 내세워 마구잡이 고소ㆍ고발을 일삼고 있다. 그의 안타까운 자해 행위를 막고 정신적 치유를 도우려면, 늘 용감한 진보성향 판사들이 나서서 뭐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그게 사법 개혁에도 좋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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