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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익숙한 곳에서 살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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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익숙한 곳에서 살 권리

입력
2012.01.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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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서촌'이라 불리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한옥에 갤러리를 시작한 지 세 해 째다. 통의동은 작년에 한옥보존지구가 되었을 정도로 한옥이 많고, 건물들도 그리 높지 않은 오래된 서울동네다. 그러다 보니 골목이 많다.

골목들에는 겨울 감나무가지에 매달린 까치밥처럼, 할머니들이 점점이 혼자 산다. 모두 수십 년씩 이 동네에서 산분들로, 전부터 살아 온 집에서 그냥 계속 살아간다. 변하지 않는 것이 꼭 골목 같다.

골목들은 대개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좁다. 그러니 이웃 할머니들과 일상이 섞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옆 한옥에는 올해 91세인 '카타리나(세례명)할머니'가 혼자 사신다. 강한 평안도사투리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한 할머니다.

이사 와서 맞은 첫 해 겨울의 일이다.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내려서 눈삽으로 골목길을 치우는데, 등 뒤에서 "잘한다 야, 우리 집 마당 눈도 좀 치우라우. 내레 힘이 없어 못 치우갔어." 라는 소리가 들렸다. 카타리나 할머니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또 당당한지, 실은 조금 놀랐다. 어느 사회복지사로부터 들은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독거노인들 이야기도 떠올랐다. 앞으로 이런 관계도가 지속되면 어쩌지 하는 염려도 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직원 중에 앞 차양이 짧으면서 납작한 헌팅캡 모자를 즐겨 쓰는 청년이 있는데, 카타리나 할머니가 골목에서 이 청년과 마주치면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피한다는 것이었다. 곧, 할머니의 기억 속에 '도리구찌는 일본 순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이렇게 오래구나... 할머니가 지나왔을 그 세월이 짠했다. 이후로 눈이 내리면, 할머니네 마당도 으레 함께 치우게 되었다. 자주 들르는 지인들 중 헌팅캡을 즐겨 쓰는 이들에게는 별도의 부탁도 했다.

골목 청소를 도맡아 하고 전시 후에 남는 양난화분도 마당에 놓아드리면서, 오래지 않아 "너희 네가 이사 와서 참 좋아"란 소리를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저녁 퇴근을 위해 대문을 잠글 때였다. 카타리나 할머니가 할머니 집 나무대문을 빠끔히 열고는 "야, 거기서 자고가면 안 되갔니? 밤에 골목이 너무 적적해."하셨다.

갤러리가 되기 전, ㄷ자형 두 채의 한옥이 나란히 맞붙은 지금의 류가헌은 살림집이었다. 저녁이면 찌개 냄새가 골목으로 새어나오기도 하고, 늦도록 밝혀진 창문 안에서 두런두런 사람 목소리도 들리는. 그런 할머니네 '옆집'이 갤러리가 된 것이다. 할머니네 앞집도, 또 저 반대편 옆집도 뒷집도 마찬가지다. 사방을 에워 싼 집들이 몇 해 사이 모두 갤러리나 문화공간이 되어, '야박하게도' 밤이면 모두 퇴근을 한다.

카타리나 할머니는 가스 비를 아끼느라, 한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켜고 사신다. 동네가 한옥보존지구가 되고 문화공간들이 들어서면서, 몇 해 사이 정말 집값이 많이 올랐다. 누군가는 비싼 값에 팔고 아파트로 이사 가서 따뜻하게 살지, 웬 궁상이냐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말을 하는 이를 보면 얼굴을 한번 다시 보게 된다. 당신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난다는 게 그리 쉽던가, 하고. 카타리나 할머니는 90여 년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익숙한 것들을 떠나보냈을까. 할머니에게는 그 한옥이 수십 년을 함께 낡아온, 자신의 집이다.

노인들을 요양시설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살던 집에 그대로 살게 하면서 그 마을에 사회복지사가 작은 집을 마련해 상주하며 돌본다는 캐나다의 복지가 부러웠던 것은, '익숙한 곳에 살 권리'라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에까지 가닿은 그들의 섬세함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류가헌에서 자고 가라고 한 그 '적적한' 밤에는 불을 켜두고 퇴근했고, 얼마 후 골목 안에 가로등을 하나 설치했다. 어쩔 수 없이 '변화의 일부'가 된 데 대한 미안함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이었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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