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해변을 나체로 거닐고 있었다. 눈길을 확 잡을만한 연기인데 구도도 파격적이었다. 해변이 스크린 윗부분을 차지했고, 수평선과 하늘은 아래에 있었다. '거장은 역시 다르구나.' 기자들과 평론가들은 경의 어린 시선으로 스크린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렇게 5분 가량 이탈리아의 노대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상이 흐른 뒤 극장의 불이 갑자기 켜졌다. "두 번째 필름 릴이 영사기에 거꾸로 끼워져 영사 사고가 났다"는 사과 방송이 이어졌다(필름 장편영화는 보통 두 개의 릴로 구성돼 상영된다). 2005년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 시사회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1990년대까지 서울 변두리 재개봉관에선 두 편의 영화 필름이 섞이는 황당한 일도 간혹 생겼다. 필름이 종말을 고해가는 이 시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해프닝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국내 스크린(2,003개) 중 필름 상영이 가능한 곳은 876개다. 디지털 상영 스크린은 1,133개로 전체의 56.6%였다. 영화의 모든 작업에 급격한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있으니 아마 지난해 필름 상영관은 더 급감했을 것이다. 올해를 기점으로 세계 최대 시장 미국도 디지털이 필름을 앞서게 되는,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필름이라는 단어는 이제 존재의 물리적 형식을 의미로 담지 못하게 됐다. 올드 팬들에게 익숙한 '비 오는 영화'도 영영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 돼가고 있다. 음반시장의 LP나 CD가 걸은 길을 숙명처럼 따르고 있는 영화 필름은 사진 필름에 비해 장수를 누렸다는 데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촬영 현장에서의 필름 사용은 이제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자신만의 영상미를 추구하며 필름을 고수했던 임권택 감독도 지난해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만들며 디지털 제작에 입문했다.
그래도 미련이나 집착이라고만 할 수 없는, 필름에 대한 강한 애착이 영화인들에게 남아있다. 촬영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디지털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들린다. 필름을 아끼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로 이뤄졌던 촬영장이 이젠 많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노장 배우는 "요즘 감독들은 한 장면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일단 다 찍어보려 한다. 배우도 인간이니 짜증이 나기 마련이고 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필름을 생산하던 회사들이 자취를 감추면 옛 영화들을 필름의 정취로 어떻게 전할 수 있겠냐는 세심한 우려도 나온다. 요술방망이 같은 디지털이 우리도 모르게 영화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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