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쓰신 글을 모두 읽으며 꼬박 1년을 보냈어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 같고, 어머니를 더 많이 느낀 기분이에요."
1년은 아무렇지 않게 흘렀으나 딸에겐 힘들면서도 충일한 시간이었다. 22일이면 한국문학의 어머니 박완서(1931~2011) 선생이 타계한 지 꼭 1년. 그간 큰 딸인 수필가 호원숙(58)씨는 어머니가 쓴 모든 글을 꼼꼼히 읽으며, 어머니의 40년 문학 인생을 되밟았다. 세계사가 26일 출간할 예정인 '박완서 전집'(전 22권)의 기획위원으로서 전 작품을 다시 읽으며 교정을 본 것이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글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그는 "작품을 다시 읽으며 새로운 것을 많이 봤다"며 "어머니가 문학 속에서 정말 살아있다는 걸 절감했다"고 말했다. 울컥한 감정에 목소리는 가늘고 저릿해졌다. '못 가본 길'을 떠난 박완서 선생은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딸이 글을 통해 동행한 셈이었다.
벚꽃 떨어지듯 솜털눈이 흩날리던 12일 박완서 선생이 생전 살았던 경기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 마을을 찾았다. 아차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시냇물을 곁으로 아담한 단독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샛노란 색깔의 3층짜리 건물이 눈에 확 띄었다. 마당 있는 집을 원했던 고인은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이곳으로 옮겼다. 마당의 듬직한 살구나무가 꽃을 활짝 피울 때면 글쟁이 친구와 후배들을 불러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도 하며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가 떠난 시절처럼,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앵두나무는 다 벗은 나목(裸木)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5년간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다 분가했던 호씨는 지난해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 건물을 기념관이나 문학관으로 만들지 말고 "네가 들어와서 살아라"는 생전 어머니의 뜻 때문이었다.
2층의 서재와 안방, 거실 등은 고인이 살던 때 그대로다. 고인이 마지막 숨을 거뒀던 안방 침대 위엔 그의 마지막 저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가 놓여 있었고, 침대 곁 수납장엔 낡은 성경책 등 머리맡에 두고 읽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고인의 고향인 개성 일대의 옛 지도가 침대 한 켠에 새로 놓였다는 점. 유족이 고인이 남긴 현금 자산 전액인 13억원을 서울대 인문대에 기부한 데 대해 서울대측이 답례로 선물한 것이다. 못>
고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것은 조각가 이영학씨가 만든 박완서 선생의 두상 조각과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다. 서재 벽면에 걸린 사진은 고인이 30여년 전 서울 보문동 한옥에 살 때 사진작가 김종구씨가 찍은 작품으로, 몇 년 전 고인이 사진전에서 발견하고 구입해 걸어뒀다고 한다. 호씨는 "어머니가 따로 영정 사진을 준비해 뒀는데, 제가 황망 중에 그 사진을 찾지 못해 서재에 있던 이 사진을 안고 집을 나서 영정 사진으로 사용했다"며 "어머니도 마음에 들어 하신 사진인데, 문상객들도 모두 아름답다고 감탄하셨다"고 말했다. 고인이 사용하던 컴퓨터, 노트북, 팩스, 프린터 등은 '영원한 현역 작가' 박완서를 증언하고 있었다.
고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아치울 집엔 지난 1년간 많은 문인들과 문학 애호가들이 다녀갔다. 호씨는 "어머니의 자취가 남은 집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서 문학인들이 방문하길 원하면 공개해왔다"고 말했다. 박완서문학관은 구리시가 토평동 토평도서관 인근에 따로 건립할 계획인데, 자택은 따뜻한 가족들의 숨결과 문인들의 발길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1주기를 맞아 전집 발간 등 다양한 추모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특이한 것은 박완서추모사업회도, 박완서 재단도 따로 없다는 점이다. 호씨는 "생전에 재단 설립에 관한 얘기를 드렸지만, 어머니가 원치 않으셨다"며 "당신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불러 모으는 일을 싫어하셨다"고 말했다. 문단을 두루 아우르면서, 어떤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고인의 삶이 타계 후에도 지속되는 셈이다. '이즘'이 아니라 삶에서 길어낸 글을 쓰던 고인은 패거리주의 밑에 깔린 허위의식과 억압을 누구보다 경계했다. 호씨는 "어머니가 가장 원한 게 책으로 남는 것이었다"며 "요란한 행사가 아니라 어머니 책을 새롭게 다시 내는 게 가장 큰 추모사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6ㆍ25 전쟁 때의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겪은 가족사적 상처가 글쓰기의 출발이었던 고인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는 치유하는 글쓰기로 상처 받은 뭇 영혼들을 위로했다. 호씨는 "어머니는 시대를 충실하게 보고 기록하고 그 시대가 주는 징후를 읽으려고 노력했다"며 "문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은 결과인데, 순수한 영혼을 끝까지 간직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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