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당시 23세)씨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 509호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진 지 14일로 25년이 된다. 쇼크사라는 경찰의 거짓말에 가려질 뻔했던 박 열사 고문 치사사건은 정확한 사인을 규명한 부검의, 경찰의 은폐 의혹을 만천하에 공개했던 천주교 사제단 등 덕분에 진실이 드러났다. 지난 25년 사건 관계자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당시 박씨를 고문한 경찰관들의 현재 소재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던 사건 은폐 조작의 최고 책임자인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직무유기 혐의 등으로 93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역대 치안총수 초청 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고문을 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은 88년 7월 정년 퇴임했고, 이후 고문기술자 이근안씨 도피를 도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물고문에 실제로 가담했던 경찰관들은 실형을 산 뒤 경찰청 산하 단체에 임용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치안본부 요청으로 왕진을 가서 사체를 처음 검안했던 오연상(당시 30세) 당시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는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단초를 연 인물. 그는 중앙대병원 내과 전문의로 지내다 2009년 서울 동작구에서 개원했다. 그는 13일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조사실 치곤 바닥에 물이 많고 대형 욕조까지 있어 의심이 갔다"며 "한 경찰관이 따라 붙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보호해 드리겠다'고 했지만 사실대로 얘기 안 하면 평생 마음에 짐이 될 것 같아 고문치사라고 진술했다"고 술회했다.
경찰의 회유와 협박에도 소신대로 부검소견서를 작성하고 이를 공개한 부검의 황적준(당시 40세)씨는 양심 증언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떠나 89년 9월부터 고려대 법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년 정년을 앞둔 황씨는"정의감보다는 법의학 전공 의사라는 직업적 소명 때문에 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씨 사체를 화장하려는 경찰을 막고 부검을 지시한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는 부산고검장 등을 지낸 뒤 99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안상수 검사는 한나라당 대표 등을 지낸 4선 국회의원이 됐다. 박씨가 목숨을 걸고 끝까지 행방을 숨겼던 선배 박종운씨는 95년 서울 강동구청장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입문, 2008년엔 한나라당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을 지냈다.
경찰관 5명이 가담한 사건을 2명만 관여한 것처럼 꾸민 사실을 구치소에서 전해 듣고 교도관을 통해 바깥에 사실을 알린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은 이후 국회의원을 지냈고, 고문치사 사실을 87년 사제단 집회에서 발표한 김승훈 신부는 2003년 9월 2일 선종했다. 고문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25주기 추도식은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14일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열린다. 박씨의 고등학교(부산 혜광고), 대학교 선배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사회를 보는 이날 추도식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등이 참여한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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