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허망한 말도 없다. 책도 책 나름이 아닌가. 아무 책이나 읽는다고 좋을 리는 없다. 게다가 책 읽기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기다. 책을 읽는 중에,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생각이 보태지지 않는다면 책 읽기는 말짱 황이다. 차라리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는 것보다도 못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독이냐, 정독이냐를 고르라면 나는 적어도 다독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양의 책을 읽으려면 생각하기는 반쯤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의무적으로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경우라면 생각하기는커녕 아마 한 권을 읽고 나서 곧바로 다른 책을 집어들어야 할 게다.
어떤 주제(중국 역사도 좋고 부동산 투자도 좋다)에 관해 소상하게 알고 싶으면 보통 그 주제를 다룬 책을 찾게 마련이다. 시중에는 그런 책이 몇 권 나와 있을 텐데, 그럴 경우 그 몇 권을 다 사서 읽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보다는 서점(가급적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그 주제를 다룬 여러 책들을 떠들어보고 그 가운데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책을 한 권만 골라 읽는 게 좋다. 반드시 독서하는 도중과 이후에 생각하기를 겸해야 하며, 다 읽고 나서 흥미롭다 싶으면 한 번 더 읽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왕도인데, 이런 독서가 가능한 이유는 책의 특유한 장점, 텍스트의 위대함에 있다. 책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보나 재미를 전달하는 매체는 많이 있다. 예컨대 영화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책은 영화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진다. 흥미로운 책은 두 번 세 번 읽게 되지만(나는 30년을 넘게 읽는 책이 두세 권 있다) 영화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두 번 보게 되지 않는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예는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고전에 속하는 '죄와 벌', '닥터 지바고'는 물론이고, '양들의 침묵'이나 '쥐라기 공원' 같은 상업 소설도 대개 영화보다 텍스트로 된 원작이 더 큰 감동과 재미를 준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가 소설을 망친 사례로 꼽히는데도 좋은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존 그리샴의 법정소설들은 처음부터 영화화를 겨냥한 할리우드풍 소설임에도 원작이 영화보다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한때 빠졌던 김용의 무협지도 항상 영화가 소설을 능가하지 못했다(한 예로, 무협지에서 천하절색으로 묘사된 남녀 주인공을 현실의 배우가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좋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 영화로 재현한 소설보다 원작이 더 재미있는 이유는 텍스트가 가진 고유한 힘 때문이다. 텍스트는 저자가 만들지만 독자에게 풍부한 해석의 자유와 권리를 제공한다. 그 자유와 권리를 제대로 누리려면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도중 늘 생각을 병행해야 한다. 소설 텍스트의 경우 아무리 묘사가 정교하다 해도 그 자체로는 비주얼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읽으면서 생각으로 비주얼을 되살려야 한다. 그러니 그것이 영상으로 구현되었을 때 독자의 상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첨단 기법을 쓴다 해도 영화가 머릿속 상상을 온전히 구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텍스트는 '입문'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영화나 TV는 아이도 자연스럽게 볼 줄 안다. 굳이 감상법을 가르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체득한다. 그러나 텍스트로 된 책은 읽기와 생각하기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쉽고 편하게 소화할 수 없다(실은 소화하는 데 상당히 힘들다는 것 자체가 텍스트의 장점이다. 그만큼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텍스트 소화하기, 책 읽기는 어릴 때부터 의식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소화하는 법을 모르게 된다. 아예 책 자체를 멀리하게 될 수도 있다.
텍스트를 낡은 매체로 여기고 시청각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아이에게 독서를 가르치지 않으면 평생을 함께할 귀중한 책 읽기의 재미를 빼앗는 셈이다.
남경태 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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