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마이클 톰슨 등 지음ㆍ김경숙 옮김/양철북 발행ㆍ468쪽ㆍ1만5,000원
이오덕 선생이 1978년에 내서 군사독재 시절 교육운동의 지침 역할을 한 에세이집 <삶과 믿음의 교실>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시 그가 교사로 있던 학교의 교문 근처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아이 셋이 한 아이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때린 아이들을 데려다 왜 그랬는지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굳이 대자면 맞은 아이가 자기들보다 가난한 집 아이고 약해서 아무리 때려도 반항을 못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그 얼마 전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도 있었다고 한다. 삶과>
지난해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학교 폭력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학교 폭력이 이 정도였나 싶게 사건은 경악할 만하다. 비슷한 피해 사례가 줄줄이 나오고, 후닥닥 대책도 마련된다. 그런데 어째 그런다고 상황이 별로 나아질 거 같지 않은 건 왜일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서? 내놓은 대책들이 급한 불끄기 같아서?
혹시 교사도 학부모도 대책을 마련하는 교육행정가도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거기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건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어른들은 잘 모르는 아이들의 숨겨진 삶> 은 미국 사례이긴 하지만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답을 제시하는 책이다. 교사를 지낸 미국의 아동심리학자이자 심리상담사 마이클 톰슨이 중심이 되어 쓴 이 책은 저자가 10년간 '아이들의 사회적 잔인성'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며 수많은 교사,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과 다양한 심리학 연구 결과를 종합한 아이들 집단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어른들은>
집단이 아이들의 성장에서 필수 불가결하다(사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지만)고 보는 저자는 유년기의 집단을 고속도로에 비유한다. 대다수 차량(아이)이 흐름에 맞추어 같은 속도로 달리는 길 같은 것 말이다. 한 아이가 시속 80㎞로 달리고 주위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속도로 달린다면 별 탈 없다. 문제는 주위의 다른 아이들이 시속 120㎞로 달릴 경우다. 그럴 때는 시속 80㎞를 유지하기가 어려우며 그 속도를 고집하거나 속도를 올리는 것이 힘에 부칠 때는 위험하기조차 하다. 더 빨리 가라고 경적을 울리거나 위험천만하게 추월하는 아이가 나타난다. 빠져나갈 나들목을 고대하지만, 설사 나들목을 발견해 잠시 고속도로를 벗어나더라도 영원히 고속도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 가고 싶다면 고속도로에 합류해야 하고, 아이들은 누구나 바로 그 어딘가에 다다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들 사회는 크게 5개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인기 있는 아이들'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고, 친구로 삼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다. 전체의 15%를 차지하는 이들은 높은 수준의 사교성과 인지능력을 갖고 있으며 대체로 부유하다. '받아들여지는 아이들'은 인기 있는 아이들 정도는 아니지만 호감의 대상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들인데 가장 많은 45% 정도다. 이밖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관심 밖의 아이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좋다고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밉다고 하는 '쟁점이 되는 아이들'이 각각 4% 정도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거부 당한 아이들'이다. 10~12%를 차지하는 이들은 또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거부 당하지만 온순한 아이들과 공격적인 아이들이다. 온순한 아이들은 따돌림을 감내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공격적인 아이들은 그 고통을 폭력으로 발산하는 쪽이다. 이들은 위협적일 뿐 아니라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집단은 이를 응징하고 그 응징은 여러 해 계속된다. 그러다가 최악의 경우 1999년 미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같은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한 아이를 따돌리자는 결정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처럼 사태를 주도하는 한 아이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수천 건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문제가 교사나 학부모가 개입해서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저자 역시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들의>
아이들이 놀림이나 욕설, 배제와 거부, 희생양 만들기, 약자 괴롭히기, 신참 골리기 같은 때로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할 권리를 지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이 사람을 흥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힘에 대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경험'이며, 게다가 집단이 될 때 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은 'N분의 1'로 지극히 가벼워진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백약이 무효라고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 분명한 도덕적인 가치를 제시해 이를 알리고 모든 구성원을 대화에 참여시킨다든지, 집에서는 아이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어디쯤 속하는지 알아두고 사이가 나쁜 아이 친구의 부모와 친해지라는 등의 현장 경험에 바탕한 대처 방안도 제시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 집단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교사나 학부모라면 사건이 발생했을 때 훨씬 냉정하게 해결책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학교 폭력의 가해자를 색출해 엄벌하고, 교사와 학부모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목소리 높이기 전에 먼저 읽어두어야 할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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