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거버(Gerber)사에서 만든 게이터(Gator)네요."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내민 칼 사진을 보자마자 나이프 갤러리(Knife Gallery) 사장 한정욱(57)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1월의 일이다. 피로 얼룩진 이 칼은 이른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범인이 사용한 흉기다. 검사는 왜 민간인인 이 사람을 찾아와 물어본 것일까. 영화 '공공의 적'에서 강동서 형사 강철중이 정육점 주인에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시신 보관함에 있는 살인 피해자의 자상(刺傷)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물어보는 유명한 장면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1997년 4월 3일 서울 이태원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당시 22세ㆍ홍익대 전파공학과)씨가 무참히 살해 당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당시 사자(死者)만 있고 살인자는 오리무중인 형국이 됐다.
키와 자상의 상관관계
이태원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던 미국인은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32ㆍ당시 18세)와 아버지가 주한미군 군무원이었던 아더 패터슨(33ㆍ당시 18세). 미육군범죄수사대(CID)는 사건 직후 머리와 양손, 상하의 옷 모두 피범벅인 데다 칼을 하수구에 버린 패터슨을 살인 용의자로 지목해 검찰로 넘겼다. 하지만 검찰은 CID의 의견을 뒤집었다. 피해자 조씨는 목과 가슴 등을 9차례 찔렸는데, 당시 부검의가 "키가 176㎝인 조씨의 목에 위에서 아래로 찔린 상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씨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 칼로 찌른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 당시 패터슨은 키 172㎝에 몸무게 63㎏, 리는 180㎝에 105㎏였다. 거짓말 탐지기마저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리의 진술은 거짓말"이라는 결론을 내놓자 검찰은 키가 큰 리를 범인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99년 9월 리를 살인 용의자로 볼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고 오히려 리는 '목격자'로 추정된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또 다른 용의자 패터슨은 이미 1년 전 미국으로 도망간 뒤였다. 흉기 소지와 증거인멸죄로 징역형을 살다 8ㆍ15 특사로 풀려난 패터슨은 검찰이 실수로 출국금지 연장신청을 하지 않은 틈을 타 98년 8월 도주했다. 그리고 검찰은 이 사건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그러다 이 사건이 2009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공분을 일으키면서 검찰이 지난해 11월 재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새로 조사할 만한 자료도, 단서도 없었다. 14년 전 작성된 피의자들의 진술서와 부검의 소견서, 사진으로 찍어둔 증거물이 전부였다.
범인은 조씨를 어떻게 찔렀나
사실 이 사건의 핵심쟁점 중 하나는 범인이 조씨를 어떻게 찔렀느냐였다. 담당검사가 한씨를 찾아 자문을 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은 패터슨이 자신보다 키가 큰 조씨의 목에 위에서 아래로 자상을 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당시 소변을 보다 칼에 찔린 조씨가 배낭을 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로 확인했다. 검사는 조씨보다 키가 작은 패터슨이 뒤에서 이 배낭을 잡고 칼로 내리 찍었을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고 한씨에게 의견을 구했다.
범행에 사용된 게이터는 미군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2㎝ 길이의 사냥용 칼이다. 한씨는 조씨와 패터슨의 키, 배낭 등을 고려해 실제로 갤러리 직원과 함께 어떤 자세로 어떻게 찔러야 목에 그런 상처가 나는지를 재연해서 보여줬다. 또 칼로 찌른 행위에 대한 패터슨과 리의 진술 내용을 꼼꼼히 읽고 자문을 했다. 한씨는 "게이터처럼 한 손에 잡히는 작은 칼은 잡는 법이 거의 정해져 있는데 진술서에 나온 칼 잡는 방법과 찔린 모양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등 수사에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검찰은 지난달 23일 "조씨보다 키가 작은 패터슨이 배낭을 잡고 범행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피가 튄 위치와 양으로 미뤄 패터슨이 진범으로 보인다"는 등의 보완수사 내용을 발표하며 사건 발생 14년 8개월 만에 패터슨을 기소했다.
도검전문가의 칼 사랑
사실 검찰뿐 아니라 강력계 형사들도 종종 한씨를 찾는다. 칼의 종류와 유통경로, 칼에 찔린 상처까지 국내에서 한씨만큼 칼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수년 전 경찰청에서 나이프갤러리에 있는 수천 점의 도검을 모두 촬영해 데이터베이스화한 적도 있다.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한씨의 갤러리는 국내에서 유일한 칼 전시관이다.
그의 '칼 사랑'은 열살 남짓 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한씨는 어릴 때부터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갖가지 칼을 모았고, 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20여년간 일하면서도 칼 수집을 계속했다. 누구나 꺼려하는 칼이지만 그는 그냥 칼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고 칼로 '사고'를 낸 적은 없다. 1990년대 말 남들보다 일찍 퇴직한 후 '인생 이모작'을 曼舟求?중 2001년 인사동에 100평 규모의 갤러리를 내 본격적으로 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갤러리에는 700년 전 만들어진 일본도에서부터 영화 '스타워즈'에 나온 '광선검'까지 온갖 종류의 국내ㆍ외 칼 3,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10여년 전부터는 경기 양주시에 100평 규모의 작은 제련소를 짓고 전통기법을 되살려 직접 칼을 만들기도 한다.
한씨는 "자상 전문가가 아닌데도 도검만 아는 나한테 경찰이 문의를 한다"며 "선진국에서는 칼이나 자상전문가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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