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TV시장 98%를 점유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통업계의 '반값TV 공세'에 드디어 손을 들었다. 스마트TV, 3D TV 등 최고급 사양 TV만 생산하던 두 회사가 마침내 실속형 저가TV를 내놓기로 한 것. 지난해 10월 말 이마트 '드림뷰' TV가 반값TV 열풍을 불러 온 지 불과 2개월여 만이다.
시장에선 이를 '반값의 반란''대형메이커의 굴욕'으로 표현하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굴복시켰다" "제조와 유통의 관계가 마침내 역전됐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은 11일(현지시간) 세계 최대전자제품 전시회인 'CES 2012'가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형마트와 인터넷쇼핑몰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값TV 열풍에 대해 "시장 수요가 있다면 우리도 저가TV를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LG전자의 이쌍수 상품기획담당 상무도 CES 2012에서 "반값까지는 아니지만 저렴한 32인치 LCD TV를 상반기 내에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LG전자 관계자는 "현재 TV가격보다 20~30% 가량 싼 가격대에 (보급형TV가)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이 대만 업체나 국내 중소기업을 통해 제작한 반값TV을 내놓자 "소비자들이 사면 후회하게 될 것" "질이 너무 떨어진다"고 평가해왔다. 워낙 싸니까 일부 구매수요는 있겠지만 브랜드파워나 품질, 기능, 애프터서비스 등 모든 면을 고려할 때 결국은 '찻잔 속 태풍'에 그치고 소비자들도 대기업 제품으로 다시 돌아올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정판매이긴 하지만, 반값TV는 마트들이 수천대를 내놓기가 무섭게 모두 매진됐다. 굳이 최고급 화질이나 최첨단 기능이 필요 없는 숙박업소 음식점 병원 등이 대거 구입하기 시작했고 거실용 '메인TV'아닌 '세컨 TV'를 찾는 가정 수요도 몰렸다.
반값TV가 시장에 먹혀 들어가자 유통망도 넓어졌다. 지난해 10월 말 이마트가 대만업체와 만든 드림뷰 TV가 큰 호응을 받으며 매진된 후 롯데마트가 LG디스플레이 패널을 채용한 국내 중소기업 제품을 '통큰TV' 브랜드로 내놓았다. 이후 인터넷쇼핑몰까지 가세, 11번가는 '쇼킹TV'라는 이름으로 사양을 더욱 높이고 가격은 낮춘 제품을 내놓아 역시 하루 이틀 만에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반값TV 열풍이 예상했던 '반짝인기'로 끝나지 않고, 기존 TV시장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게 되자 결국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보급형 저가제품을 출시키로 한 것이다. 이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가 시장을 오판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절대적 점유율을 갖고 있는 대형업체들은 '우리가 시장을 만든다'는 다소 오만한 생각을 갖기 쉬운데 이번에 시장의 힘과 소비자의 위력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업계는 양대 전자회사들의 보급형TV 시장 출시계획을 밝히자 긴장하면서도 "결국 유통의 힘이 승리한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형마트들은 수년 전부터 저렴한 자체상표(PB) 상품을 통해 웬만한 제조업체에 대해선 '우위'를 확보해왔지만, 전자제품과 같은 첨단ㆍ고가시장에선 여전히 제조사가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번 반값TV의 돌풍과 대형가전사의 굴복을 계기로 '유통우위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유통업체와 함께 기획한 저가TV가 전체 TV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미국에서도 저가TV 시장이 커지면서 고급TV 가격까지 낮아지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대 교수는 "유통업체들이 복잡한 가전제품도 기획할 수 있는 노하우가 쌓이고 대만 등 글로벌 발주까지 가능해지면서 이젠 가전업체와 경쟁할 수 있게 됐다"면서 "대형 유통사들이 대기업이 장악한 시장에서 부품 납품업체로 전락한 우리 중소기업을 중요한 파트너로 발굴했다는 점도 의미 있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라스베이거스(미국)=허재경기자 rick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