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 속에 있는 글자가 마냥 좋았다. 어른이 된 지금이라면 이상 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는 꽤 특이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린 아이라면 대개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나는 오직 글자만 가득한 책을 더 좋아했다. 오히려 책에 글자와 그림, 혹은 사진이 함께 들어있으면 책 읽기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다 읽은 다음에도 머릿속에서 글자와 그림이 한데 섞여 빙빙 돌아다녀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런 일은 계속됐다. 어른이 되고 나서, 자연스레 나는 '책'이라고 하면 거기엔 당연히 글자만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내용 중간에 그림이나 사진 넣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면, 책속에 있는 그림이나 사진은 쓸데없이 본문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다가 어떤 가수가 심각한 목소리로 노래한 나이, 서른 즈음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어른이 되면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라.'였다. 정작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책'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밤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며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못한 채로 더 늦으면 가장 먼저 내 스스로에게 미안하고, 더구나 내가 그 동안 입으로 떠들었던 모든 게 거짓말로 남게 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와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진짜 즐거움을 찾았다. 2007년에는 드디어 내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낸 헌책방을 열었다. 책을 좋아하니까 책방을 만들고 거기서 일하며 돈도 벌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당연히, 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과 주인이 되어 가게를 책임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자리에 앉아서 하루 종일 느긋하게 책이나 보면서 지낼 줄 알았는데 그건 영화나 소설 속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지난 몇 해 동안 책방에서 일하며 얻은 교훈이 한 가지 있다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책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가를 깨달은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나는 혼자서 책을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이 곧 내 지식이라고 생각했고 많이 읽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갖추게 될 걸로 믿었다. 지식을 많이 쌓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믿었다. 책 속에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을 싫어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거기에 있다. 내게 지식이란 글자 자체였다. 그러니까 글자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림을 넣는 건 낭비라고 생각한 거였다.
헌책방을 열고 이제 햇수로 육 년째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읽은 책 두 권이 공교롭게도 모두 만화다. <아스테리오스 폴립> (열린책들)은 건축가로 이름을 알린 '폴립'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데, 편견을 넘어서 독선에 빠져 사는 주인공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뜨끔했다. <로지코믹스> (랜덤하우스코리아)는 너무도 유명한 책 <서양 철학사> 와 <수학원리> 를 쓴 영국 논리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만화로 보여주는 책이다. 폴립과 러셀 그림은 교묘하게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책 속에서 나는 작가가 붓을 움직여 만든 그들을 보고, 그게 그림이 아니라 글자였다면 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학원리> 서양> 로지코믹스> 아스테리오스>
책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책에 대해서, 책 읽기에 대해서, 책방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편견을 갖고 산다. 지금은 출판시장이 불황이라든가, 인문학의 위기라든가, 아이부터 어른까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 편에서는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책을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가 아니다. 직장인들이 한 달에 평균 몇 권씩 책을 읽느냐 하는 통계는 말 그대로 자료일 뿐이다. 그보다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는지, 책을 무어라고 여기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 볼 일이다.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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