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라는 말, 희망적인가. 혹은 한숨부터 나오는가. 나는 한숨부터 나오는 사람에 속한다. 미래라는 말에서 어떤 가능성보다는 변수들이 매복해 있는 불길함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은 질서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됐다. 상식 바깥의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물가가 불안한 것은 기본이고, 천재지변이 부쩍 잦아진 기후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상식을 넘어서버린 비극들이 매일매일 하루 세 끼처럼 우리 앞에 찾아와 겨우 가다듬은 평안을 흔들어놓고야 만다. 올 겨울만 해도 그렇다. 나의 동료 송경동 시인을 비롯해서 죄 없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둔갑하는 사건이 거듭해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사회는 상식 너머의, 이해 불가능한 원칙들이 작동하고 있다. 불안하고 억울하고 괴로워서 살기가 힘들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의지할 곳을 찾곤 한다. 단짝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들고, 동료를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해 누군가는 동호회에 가입하고, 누군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 비로소 안정감이 찾아온다. 소속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 생긴 소속감이 우리에게 설렘을 선물한다. 불안감이 설렘으로 바뀌자 살아있다는 존재감이 밀려온다. 실로 기쁘기 시작한다. 나의 준거집단에 대한 충성심도 솟아나고, 이 기쁨을 널리 퍼뜨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속한 준거집단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고 확신이 자리를 잡는다. 불안했던 지난 날에 비하면 편안해졌을 뿐만 아니라 뿌듯하기까지 하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비로소 세울 수 있을 확신이 생긴다. 세상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도 말이다.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의 이 소속감을 나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것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수많은 타인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나의 준거집단을 작동시키는 논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논리를 지닌 사람들의 생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내 준거집단을 훼손하는 시선처럼 여기거나 심지어는 뭘 모르는 한심한 작자 취급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유연한 태도와 시선을 잃은 완고함으로 무장돼 버린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내게 보이는 태도에서도 그걸 느끼며, 최근 '나꼼수 열풍'을 다각도로 바라보려는 비판적인 시선에 대응하는 나꼼수 매니아들의 태도에서도 그걸 느낀다. 왕따에서 학교폭력으로, 마침내 자살로 이어지는 우리 청소년들의 학교소식은 목숨을 건 채로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준거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갈구하지 않은 채 홀로 이탈해 혼자 힘으로 지내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 된 거라고.
곧 중학생이 될 조카가 외톨이 기질이 엿보여 슬쩍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학교에서 아이들과 친해지기 어렵다 느낄 때, 어떻게 할래?" 조카는 쉽게 대답했다. "절대 튀지 않게 행동하고, 애들이 좋아하는 걸 따라서 좋아하면 돼요." 조카의 지혜로운 대답에 안도감과 동시에 착잡함을 느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만의 색깔과 감각과 성질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하는 걸까. 소속감을 얻기 위한 대가로 치르는 이 희생들이 나는 아무래도 잘못된 것만 같다.
아무 소속감 없이 사회에 내던져질 수는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보통의 열아홉 살들은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은 이제 취업의 관문도 아니고 학문의 전당도 아닌 채로, 어정쩡한 청춘들이 그나마 소속감을 지닌 채 살아가게 해주는 허술한 보호시설에 불과해졌다.
나에겐 이 칼럼이 새해 들어 처음 쓰는 글이다. 그래서 올해 소망을 이 칼럼에 적어본다. 올해는 부디 청춘들이 혼자라는 불편이 싫어 연애와 대학을 소비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건강하게 다스리기를. 소속감이 주는 존재감과 안정감도 좋지만, 소속감을 벗어났을 때에 얻는 해방감과 독립감을 만끽하길. 의지할 데가 있어 좋은 소속감에서 책임감을 느끼는 소속감으로 나아가보자고. 강력한 소속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근차근 생각하고 궁리하는 합리적인 힘으로 선거도 치르길.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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