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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사소한 물음에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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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사소한 물음에 답함

입력
2012.01.1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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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요. 취직이 쉽지 않아요. 누군가 "외국대학 출신에 비해 학벌이 낮은 거 아니겠냐"고 직설을 던졌더니 한 친구가 농담으로 받아치는 거예요. "학벌이야 내가 최고지. 열심히 배우고 익힌 죄로 벌 받고 있는 걸로 따지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가 시인이 떠올랐어요. 학벌이야 송경동이 최고죠. 들, 바람, 강물, 담벼락, 좌판, 모든 것에서 열심히 배운 사람. 배워서 희망을 행했다는 이유로 이 겨울, 감옥에서 벌 받고 있어요. 하지만 시인을 무시하던 학벌주의자도 이제는 시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박사 비정규직 노동자나 노동자 시인이나 함께 싸울 수 있어요. 대졸 실업자들도 물론 함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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