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이사회에 유명한 한 인도 인권 활동가가 있다. 인권이사회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엔 인권 기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다. 이 분은 가톨릭 신자다. 내가 일하던 가톨릭 평신도 단체에서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미사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신앙에서는 거의 보수에 가깝다고 할 만큼 자신의 신앙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이분이 참석한 한 가톨릭 모임에서의 일이다. 그 자리에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도 참석했었다. 당시 유엔인권이사회가 동성애와 인권 문제로 한참 시끄러웠던 터라 여기서도 자연스럽게 그 주제가 테이블에 올랐다. 고위 성직자가 가톨릭 인권단체들에 우려를 표하면서 교의에 따라 반대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몇몇 가톨릭 활동가들이 여기에 동조하며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국 신사' 뺨치는 고상한 분인지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고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 노신사가 외친 말은 이러했다. 여보시오. 우리는 지금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자에 대한 모욕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동성애가 아니라 인권이 주제란 말입니다! 인권!
소박한 말이었다. 급진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문제적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급진주의의 세례를 받은 터라 이런 식으로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론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여움'은 대단히 아름답고 숭고했다.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 담긴 말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동성애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낄낄대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세에 눌려 완전히 밀려난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인도에서 종교와 도덕에 대한 신념이 어떻게 폭력이 되어 이웃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게 되는지를 많이 봐왔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름으로 어제 저녁까지 호형호제하던 사이에 죽창을 들고 찌르고 불에 태우는 것도 봤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신한 이웃을 마구 두들겨 패고 강간하는 것도 보았다. 숭고한 신앙과 도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잔혹한 폭력과 야만으로 돌변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인권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느꼈다.
그는 신앙이 살인무기가 되고 자신의 형제자매가 타인의 존재를 파괴하는 괴물이 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를 인권에서 발견했다. 인권은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그를 다른 모두와 동등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따져 골라가며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인권이 아니다. 그건 특권이다. 반대로 인권에는 자격심사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인권의 보편성이다. 인권이 자격을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인권은 배제의 수단이 되고 만다. 자격을 잃고 배제된 이들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모욕과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 배제를 방지하기 위해 인권의 언어는 가장 차별 받기 쉬운 사람을 명시함으로써 모두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배제는 특정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빌미로 구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서도 성적 지향이 '굳이' 들어간 이유다.
그런데 인권의 이 구체성이 몹시 못마땅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도덕의 이름으로 서울시교육청을 압박하여 인권조례 재의를 요청하게 했다. 이들은 인권이 선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도덕이 바로 잡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인권이냐, 도덕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우리가 단호히 반대해야 하는 것은 이 질문 자체다. 이 질문이 차별과 배제의 야만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 신앙심 깊은 인도의 노신사처럼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권이냐, 야만이냐.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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