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할 정체성의 시험대다. 적당히 투쟁하다 타협했다가는 민주진보진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해 초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진영이 한미 FTA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할 때 측근들이 조언한 내용이다. 손 전 대표도 재협상이 이루어진 한미 FTA는 이익균형이 깨졌다고 판단,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측근들이 이런 조언을 한 것은 야권의 '골품제' 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 골품제는 신라의 신분제로, 왕족인 성골, 진골과 1~6두품으로 구성됐다. 28대 진덕여왕 때까지는 성골만이 왕이 됐고 이후 29대 태종 무열왕 때부터 진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됐다. 진골 다음의 신분은 귀족인 6두품으로 '되기 어렵다'는 의미의 득난(得難)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6두품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신라 17관등 중 6관등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고 5관등인 대아찬 이상은 왕족만이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가옥 의복 수레 관복에도 왕족과 차별이 있었다.
■ 민주통합당 나아가 민주진보진영 내에 골품제가 진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정체성 시비를 당해야 하는 손 전 대표 측에게는 정서적 장벽으로서의 골품제가 있었다. 전략기획을 담당한 한 측근은 야권의 성골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키우고 발탁한 인맥으로 주로 호남을 기반으로 하며, 진골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인맥으로 야권 통합 국면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룹이라고 했다. 손 전 대표는 6두품에 해당한다고 비유했다.
■ 신라 시대 6두품 중에는 설총 강수 최치원 원효 등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손 전 대표도 복잡다기한 당내 세력을 잘 추슬러 야권 통합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공적은 적지 않다. 신라 후기 혼란이 극심했던 것은 계급제도의 모순과 진골 왕족 간 권력투쟁이 주요 원인이었음을 상기하면, 능력과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골품제는 민주진보세력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골, 진골, 6두품이라는 제약 없이 지도자의 품격과 능력만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됐으면 싶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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