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산행은 독살스러운 사람만 덤비는 일로 여겨진다. 그것도 백두대간의 등뼈가 북서북으로 치닫는 부분, 그러니까 영서에서 영동으로 가로질러 넘는 강원도의 칼바람 등성마루는 손가락 몇 개쯤 잃어도 상관없다는 알피니스트의 영역으로, 멀고도 높게만 올려다 본다. 그곳에 영롱한 순백으로 피어난다는 눈꽃. 그러나 그걸 보기 위해 꼭 어마어마한 각오를 할 필요는 없다.
선자령은 강릉과 평창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뫼(山)가 아닌 재(嶺)를 이름으로 삼은 연유는 뚜렷하지 않다. 여하튼 해발 1,157m에 이르는 봉우리다. 숫자를 보면 덜컥 겁이 날 수 있다. 하지만 걷는 길은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832m)에서 시작된다. 올라야 할 높이는 325m, 서울에 있는 인왕산 정도다. 겨울산에 익숙하지 않아도, 아이의 손을 잡고도 너끈히 오를 수 있다.
"노르딕이네! 우리 나라에도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사람이 있구나."
동트기 전 휴게소에서 출발해 살짝 땀이 날 무렵, KT중계소를 지나 얼마 안 된 눈길에서 앞서 가던 이가 바닥을 가리킨다. 두 줄로 길게 평행한 발자국. 스키가 지나간 흔적이다. 대관령에서 선자령에 이르는 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느슨하게 뻗어 있어 트레킹뿐 아니라 노르딕 스키(평지나 언덕에서 타는 스키)를 즐길 만하다. 발자국의 주인을 만나진 못했다. 눈을 뒤집어 쓴 침엽수림을 부드럽게 활강하는 기분이 궁금했다.
다져진 곳을 벗어나면 무릎 위까지 푹푹 눈에 빠지는 눈길을 1시간 남짓. 새봉에 이르렀다. 옆으로 누운 아침 햇살이 육림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풍 목책을 뚫고 몸에 와 닿는다. 맑은 하늘이 서서히 투명한 물빛으로 바뀐다. 하지만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강릉 땅은 무지근한 안개를 두르고 있다. 산자락에 비좁게 자리잡은 도시가 끝나는 곳에서 너른 바다가 시작된다. 안개를 통과하느라 바다의 푸른 색이 둔하고 무거워 보였다.
반대로 하늘의 색깔은 시시각각 진청을 풀어놓은 톤으로 깊어진다. 순백의 산과 시리도록 파란 하늘, 그 속에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도는 풍력발전기들. 정상에 오른 순간, 그것들은 진부하지만 모자라지 않은 감흥으로 눈 앞에 어우러져 풍경을 이룬다. 두어 시간 눈길 산행을 증명하는 스탬프인 듯, 사람들은 열심히 기념 사진을 찍어댄다. 모든 방향에서 고추바람이 불어닥친다. 바람이 매울수록 정상에 오른 뿌듯함은 크다.
왕복 등산로는 두 갈래다. 대관령 출발점을 기준으로 바다를 볼 수 있는 오른쪽 능선과 나무가 많은 왼쪽 골짜기길이다. 오르고 내리는 길을 다르게 잡아야 선자령의 다양한 면모를 모두 느낄 수 있다. 왕복하는 데 넉넉히 잡아 4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이 험하진 않지만 곳곳에 눈이 쌓여 얼어 있기 때문에 아이젠과 스패츠를 꼭 챙겨야 한다. 겨울 산행에 자신 있다면 이어지는 약 8㎞의 대관령 옛길을 함께 걷는 코스를 짤 수도 있다. 문의 평창국유림관리소 (033)333-2182.
평창=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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