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 "기초생보제 분할, 필요한 급여만 제공"
우리나라에서 5가구 중 1가구는 벌이가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절대적 빈곤가구에 속한다. 개인 기준으로는 10명 중 1명 꼴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2010년 기준 빈곤통계연보에 따르면, 시장소득(연금, 정부지원금을 제외한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절대적 빈곤가구율이 17.6%이며, 개인의 빈곤율은 12.1%이다. 더구나 개인 빈곤율 추세는 2006년 10.7%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빈곤층 지원 논의는 상대적으로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 논의 활발
한나라당은 민주통합당의 보편적 복지론에 대응해 맞춤형(선별적) 복지를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아직 당론으로 정해진 저소득층ㆍ노인 지원 정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대신 눈여겨볼 제안은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책 브레인 역할을 맡고 있는 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패키지로 제공되는 기초생활보장 제도를 의료ㆍ교육ㆍ주거ㆍ생계 지원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의료혜택이 절실한 장애인 가구, 아이들 교육이 가장 걱정인 다자녀 가구 등 가구의 특성에 따라 필요한 급여만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한나라당 공약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통합당에서는 이낙연 의원이 부양의무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자녀와 연락을 끊고 지내는 소득 없는 노인들이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낙연 의원의 법안은 소득기준으로만 수급권자를 선정하고, 부양능력이 있는 부양의무자가 확인되면 비용을 물리자는 내용이다. 부양의무를 없애는 것은 아니므로 폐지가 아닌 완화 방안이라는 학계의 해석도 있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도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고, 민주통합당 주승용 최영희 의원은 부양의무를 지는 범위를 '1촌 직계와 배우자'에서 '1촌 직계'로만 축소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말은 최우선, 실제로는 뒷전
문제는 이런 논의들이 간헐적으로 오가다 만다는 점이다. 위의 법안들은 1년이 넘도록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 소위에 계류 중이다. 민주통합당은 보편적 복지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우리당의 기본입장은 저소득층, 장애인, 실업자, 노인, 고아 등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보편적 지원정책보다 우선시 한다는 것이다"고 밝혔고, 한나라당은 맞춤형 복지를 내걸고 있으면서도 저소득층 정책을 펴야 할 순간에는 모두 소극적이다.
일례로 지난 해 말 2012년 예산 처리를 앞두고 여야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보다 보육료와 기초노령연금 예산을 대폭 늘리는 방안을 합의했었다. 그러나 결국 0~2세 영유아의 보육료 지원을 전체로 확대하는 예산안은 통과하고, 저소득층 노인에게 한달 쥐어주는 노령연금 최고액을 월 9만여원에서 11만원으로 늘리는 안은 통과하지 못했다. 기획재정부가 반대했다는 이유라고는 하지만, 정치권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편 지원하면 저소득층도 혜택
한국일보가 5명의 전문가들에게 저소득층 지원 정책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 결과 기초생활수급제도 개편, 기초노령연금ㆍ근로장려금 확대, 부양의무제 완화 등에 대해 대부분 필요성을 인정했다. 다만 근로장려금의 경우, 김상균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기업이 임금을 올려줄 수 있는데도 정부가 대신 내주는 꼴"이라며 "중소기업 근로자에게만 지원해야 한다"고 주목할 만한 제안을 했다.
특히 '보편적 복지보다 저소득층 지원 확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문항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난이 쏟아질 정도로 학계는 선별-보편 복지의 이분화에 반감이 컸다. 백종만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층 건축에서 안전띠를 메고 안전모를 쓰게 하는 것은 보편적인 복지이고, 그래도 추락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래 안전 그물망을 치는 것이 기초생활보장인데 우선순위를 묻는 것은 반(反) 복지적 질문"이라고 말했다. 김상균 교수는 "보육ㆍ교육 같은 보편적 인프라가 필요한 부분은 저소득층 지원과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고 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질문 자체에 어폐가 있다"며 "일단 우리는 뭐가 됐건 복지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고, 보편적 복지가 이뤄지면 공적부조(저소득층 지원)도 동시에 어느 정도 해결되며,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들이 공적부조 비용이 적다"고 설명했다. 최예륜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도 "한국사회의 복지는 그 절대적인 질과 양이 부족하므로 무조건적인 증대가 시급하다"고 했다.
다만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인인구의 45%가 빈곤이고, 워킹푸어(근로빈곤층)가 600만명, 4대 보험 혜택을 못받는 사람들이 수백만명이다"며 "저소득층을 놔두고 보편적 복지를 정치권이 들고 나온 것은 표 때문"이라고 저소득층 지원이 보편적 복지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기초생활보장제 구멍 숭숭
혼자 움직일 수 없는 30대 중증장애인 송모씨는 28년 만에 장애인 시설을 떠나 자립하려고 했으나, 노모에게 작은 집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하자 좌절했다. 노모가 30년간 고생해서 대출까지 받아 어렵게 마련한 집인데, 그 집마저 팔아서 자신을 부양하라고 해야 할까. 송씨는 지난해 7월 국민신문고에 하소연을 했다. 이처럼 국민신문고에 접수되는 기초생활수급 관련 고충민원은 2009년 7,653건, 2010년 6,935건, 지난해 7,147건(11월까지)에 이른다.
현 제도는 부양의무자(1촌 직계나 그 배우자)가 소득이 없어도 일정한 기준 이상의 재산이 있으면 소득으로 환산돼 수급자가 될 수 없다. 서울 등 대도시는 기본재산이 1억3,300만원만 인정되고 그 이상은 소득으로 환산되는데, 집값이 고가인 우리나라의 특성상 그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65세 빈곤노인이 90세 노부모의 집 한 채 때문에, 또는 40대 장애인이 70대 노부모의 집 한 채 때문에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엄격한 잣대 때문에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데도 기초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은 집계방식에 따라 103만~600만명으로 추산된다. 보건사회연구원의 빈곤통계연보를 기준으로 하면, 전체 12%가 절대빈곤층(시장소득 기준)인데 기초수급자는 3%(약 150만명)에 불과하니 산술적으로도 약 500만명이 비수급 빈곤층인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7월까지 부양의무자 재산의 소득환산기준을 완화하는 개선안을 내놓기로 했다. 올해부터 노부모 부양의무를 지는 자녀의 소득기준이 완화(최저생계비의 130% 미만에서 185%미만으로)되지만, 소득기준 완화만으로는 위와 같은 복지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권덕철 복지부 복지정책관은 "올해 안에 면밀히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서 2013년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3일 국민권익위원회도 일정규모 이하의 1주택을 '기본재산'으로 인정해 부양능력에 포함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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