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88년까지 외산담배 수입 금지로 오로지 전매청에서만 담배를 독점적으로 공급해왔다. 이때는 담배 이름을 멋있게 붙일 필요도 없었고, 디자인에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88년부터 외산 담배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 담배는 외산담배와 디자인 경쟁에 나섰다. 담배회사는 감각적인 이름과 화려한 색상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담뱃갑을 멋지게 꾸미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끔은 청소년을 노리기 위해 젊은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디자인을 넣은 청소년용 특별보급품을 만들어서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담배는 멋지고 화려한 인생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열 가지 이상의 암과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폐 질환을 일으켜 한창 일할 중년의 나이에 질병이나 죽음, 가족과의 생이별을 맛보게 하는 끔찍한 물건이다. 발병되면 80%가 3년 안에 죽을 수도 있는 폐암의 90%를 담배가 일으킬 뿐 아니라, 5년 이상 생존율이 5%에도 못 미치는 췌장암도 담배 말고는 제대로 알려진 위험인자가 없다.
그런데 이 담배에 붙은 경고문은 이러한 현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담뱃갑 최초의 경고문은 76년에 만들어진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갑시다'라는 문구였다. 이 내용은 담배의 해로움을 전달하기는커녕 담배를 적당히 피우라는 말이지 담배를 끊도록 권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89년부터 담배가 폐암을 일으킨다는 문구가 들어갔고 다양한 문구로 발전했지만 문제는 이 문구가 효과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외국에서는 작은 글씨로 표기하는 것만으로는 흡연자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담배가 일으키는 질병을 사진과 도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캐나다를 비롯해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모든 유럽국가들과 태국, 말레이시아까지 담뱃갑에 사진을 싣고 있다.
세계 각국이 세계보건기구(WHO)의 주도하에 흡연 및 간접흡연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체결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 따르면, 담뱃갑 면적의 30% 이상에 경고문을 넣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사진을 포함할 것과 주기적으로 교체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3년 7월 21일 담배규제기본협약에 서명하고, 2005년 5월에 비준한 바 있다.
보건복지부도 담뱃갑에 사진을 포함한 경고문 도입을 위해 입법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일부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아직까지 국회에 계류 중인데, 반대 논리가 황당하다. 사진들이 끔찍하다는 것이다. 물론 폐암 사진이나 뇌출혈이 있는 사진 또는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암 환자의 사진 등은 끔찍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간과한 것은 사진에 보이는 그 끔찍한 일들이 매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매년 담배 때문에 죽는 사람이 5만 명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흡연 예방을 위해서는 담배로 인한 해로움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담배 경고사진이다.
현재 담배 포장에 그림경고를 사용하는 나라는 캐나다, 브라질, 싱가포르 등 40개국이며, 경고문구나 경고그림의 크기를 50% 이상 사용하는 나라는 우루과이, 멕시코, 필리핀 등 18개국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각 나라의 경고문구 도입 정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 등과 함께 공동 77위에 머물고 있다.
내년에는 WHO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당사국 총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총회 주최국으로서 담배규제기본협약이 제대로 이행되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또한 앞으로 담뱃갑 경고문에 사진을 포함하는 일을 방해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있다면 국민들이 눈여겨 그 이름을 기억해 둬야 한다. 그들이 국민의 건강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서홍관 국립암센터 국가암관리사업본부장 ·한국금연운동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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