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의 연인은 창덕궁 전화교환수였다. 열 아홉의 모던걸 홍정순은 61세 황태자 의친왕의 마지막 후궁이 됐는데, 이 둘을 이어준 것이 전화였다. 전화라는 뉴미디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전화교환수라는 직업이 없었다면 아마 의친왕의 마지막 로맨스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신문, 잡지, 문헌 자료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복원해온 인문학자 이승원(41ㆍ인천대 강사)씨가 이번에는 '직업'을 파고 들었다. 신간 <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발행)는 전화교환수를 비롯해 변사, 버스 여차장 등 근대 초기에 생겨났다가 사라진 9개 직업의 흥망성쇠를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를 소개한 책이다. 사라진>
이씨는 "직업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의 배치와 경제적 메커니즘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세상이 변할 때마다 신종 직업이 등장합니다. 직업의 변화는 사회 변화와 맞물려 있죠. 예컨대 전화교환수는 근대 통신담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버스 차장은 철도로 시작된 조선의 교통시설을 상징합니다." 그의 설명처럼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들은 각각 통신, 영화, 젠더, 독서, 모성, 교통, 의학 등 근대문화의 상징적 풍경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읽힌다.
한국 역사에서 소설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叟)의 실체가 문헌상에 알려진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근대 조선뿐만 아니라 중세유럽, 스페인 점령하의 쿠바 등 전세계적으로 있던 직업이다. 저자는 근대에 전기수가 등장한 배경을 "파편화된 개인들을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 낭독 문화의 특성"에서 찾는다. 낭독이 공동체적 개인을 길러낸다면, 묵독은 고립된 개인을 만드는데, 낭독 문화가 현대의 묵독 문화로 바뀌며 전기수와 같은 직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20년대 버스가 거리를 지배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직업이 일명 '뻐스 걸'로 불린 여차장이었다. 15세 이상 20세 미만의 미혼 여성들로 짙은 청록색 치마 정장에 굵은 허리띠를 두른 그녀들은 근대 조선의 교통과 여성의 사회 활동을 상징하는 직업이었다. 물장수와 약장수는 20세기 초 시민들의 '토털 헬스 케어'를 담당했던 직업이고, 근대 유모는 조선시대 유모와 달리 모성을 상품화한 직업이었다.
이씨는 "개인의 욕망에 따라 어떤 직업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 사회의 주된 욕망이 무엇인가에 따라 개인들이 선택하는 직업 선호도는 달라진다"고 말했다. "근대의 욕망을 한마디로 집약하자면 행복입니다. 근대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수단에 주목했던 시대였고, 사람들은 그 수단으로 직업을 고려했습니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에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통해 근대 조선의 역사를 복원해온 이씨는 "앞으로 나혜석, 백남운 등 근대 지식인의 삶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는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소리가> 세계로>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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