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절이 언제 끝나는지를 정확히 잡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록 24절기에 '입춘', '입추' 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천기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일 뿐, 땅에 사는 인간 사회의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추위 혹은 닷발 늘어지는 더위가 계속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변절기의 한복판이 되면 가을옷을 겹쳐 입어야 하는지 겨울 외투를 하나 걸쳐야 하는지, 또 긴팔 봄 셔츠를 입고서 팔을 걷어야 하는지 반팔 여름 셔츠로 입어야 하는지 망설이고 헷갈리게 된다.
2008년에 시작된 지구적인 경제 위기로 신자유주의라는 계절이 저물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확해졌다. 자본주의의 긴 역사 속에서 지난 40년 정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체제의 기간도 하나의 계절 순환에 불과하다.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의 지구적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략 40년 정도의 주기로 전혀 다른 세 개의 정치경제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달력으로 삼아 24절기를 짚어보면 대략 지금이 또 다른 형태의 정치경제 체제로 이행하려는 순간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천기의 변화일 뿐, 인간 세상에서의 계절의 순환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생각은 지금 전 세계 도처에 만연하여 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그야말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뿐,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30년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표독스럽게 우리 머릿 속에 쑤셔넣은 신자유주의의 각종 교리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금융 시장은 완전하다'는 가설은 그릇된 가설일 뿐이라는 게 현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도 여러 구석구석에서 시장 특히 금융 시장의 탈규제만이 살길이라는 각종 정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소위 '낙수 효과'라는 이름 아래 세금을 감면해야 소비도 투자도 늘어나서 중하층도 풍요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난 몇 십년의 실험 결과 온 나라 아니 온 지구를 뒤덮은 지독한 양극화로 귀결되었건만, 아직도 조세 감면을 집요하게 추진하는 세력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이건 유럽이건 청년들의 가방끈을 길게 해주면 '지식 자본'이 생겨 저절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학만 살찌우고 등록금만 높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학자금 부채를 잔뜩안고 있는 청년 실업자들까지 양산해 놓았지만, 여전히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로 고등교육을 바라보는 사고틀은 건재하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계절의 변화를 특히 인정하기 싫어할 때가 있다. 변변한 겨울 외투가 없는데 가을이 끝나갈 때이다. 이 때 사람들은 미욱한 짓인 줄 알면서도 가을옷을 뚜룩뚜룩 겹쳐 입고 봄옷의 소매를 둥둥 걷어부치고 아직 가을이라고 아직 봄이라고 우긴다.
지금도 그러하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치경제의 조직 및 운영 원리는 분명히 그 시효가 다했지만, 새로운 조직 및 운영 원리를 장만해 놓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하던 대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낡은 정치경제 체제의 소멸을 무의식 속에 직감하고 있지만 이를 무의식 속에 계속 짓눌러두고 싶어한다.
이 어색한 침묵과 평온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작년 한 해 동안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은 거세게 움직이는 '저항자들'의 물결에 휩쓸렸다. 이들 운동의 형태와 요구는 다양했지만, 한결같이 지난 40년간 유지되어 온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맞추어져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영원히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겨울 추위에 오그라든 게으름뱅이 배짱이가 될 뿐이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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